詩音律庭園 139

천 원짜리 러브레터 / 유미성

천 원짜리 러브레터 / 유미성 너에게 편지를 썼어 조폐공사 아저씨들이 알면 큰일나겠지만 천 원짜리 지폐에 깨알같은 글씨로 너의 안부와 나의 마음을 적었어 그 돈으로 편의점에 가서 담배 한 갑을 샀어 언젠가 그 돈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거쳐 혹시나 네 손에 들어가게 되면 어느 날 네가 카페에서 헤이즐럿 커피를 마시고 받은 거스름돈 중에 혹시나 그 돈이 섞여 있어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그랬다면 너 돌아와 줄래 운명이라 생각하고 그 돈으로 영원히…… 내 마음을 사지 않을래? 유미성 시인 웨딩업체운영 시집 산문집

詩音律庭園 2019.12.20

그대로 인해 나 이처럼 행복해도 될까요 / 고은설

그대로 인해 나 이처럼 행복해도 될까요 / 고은설 바람처럼 일어나 내 가슴 깊은 곳에 천천히 고여가는 그대로 인해 나 이처럼 행복해도 될까요 연두빛 꿈결로 다가와 내 체온 속으로 밀물처럼 밀려드는 그대로 인해 내 영혼이 이처럼 눈부셔도 될까요 갈색의 대지에 옹골지게 물들어 가는 은총의 색깔들 그대로 인해 나 이처럼 아름답게 채색되어도 될까요 그리움과 축복이 같은 부피로 채워지는 아침같은 시간들 나직히 불러보는 그대라는 이름 나 이처럼 봇물 터지듯 그대를 그리워해도 될까요 그대라는 강물 위에 투명한 이야기들을 풀어제끼고 푸른 물길을 따라 은빛 날개를 퍼득이며 그대가 있는 곳에 날아가 그대에게 최후의 기쁨으로 스며드는 한 방울의 삶이 되고 싶은 소망을 품어도 될까요 그대로 인해 내가 이처럼 행복해도 될까요 ..

詩音律庭園 2019.12.18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 김현승 ..

詩音律庭園 2019.11.26

노을 / 기형도

노을 / 기형도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오후 6시의 참혹한 형량 단 한 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상징들을 몰아내고 있다 도시는 곧 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속도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책이 되리라 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오후 6시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

詩音律庭園 2019.11.20

멀리서 빈다 / 나태주

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위 4개의 그림은 화가 이성태 작품임 * 나태주 시인 충남 서천 출생 공주사범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졸업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 1971년 신춘문예에

詩音律庭園 2019.11.19

가을날 / 김현성

가을날 / 김현성 가을 햇살이 좋은 오후 내 사랑은 한때 여름 햇살 같았던 날이 있었네 푸르던 날이 물드는 날 나는 붉은 물이 든 잎사귀가 되어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을 해야지 그대 오는 길목에서 불붙은 산이 되어야지 그래서 다 타 버릴 때까지 햇살이 걷는 오후를 살아야지 그렇게 맹세하던 날들이 있었네 그런 맹세만으로 나는 가을 노을이 되었네 그 노을이 지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았네 김현성 시인, 가수, 작사가, 작곡가 많은 카페와 블로그에서 이 시의 지은이를 를 쓴 김현승(1913 - 1975)으로 소개하는 분들도 많이 있지만 김현성이 맞다 이 시는 김현성 시집 에 실려있다 이 시집 첫번째 시가 이고 두번째 시가 이다 또한 이 시집에 가 1, 2,3 연작시 형태로 실려있다 한국의 음유시인, Singer-..

詩音律庭園 2019.11.10

별빛보다 먼 그리움 / 김홍성

별빛보다 먼 그리움 / 김홍성 그대와 나 사이만큼 하늘과 땅 사이도 이만큼 멀까 하루에도 몇 번씩 쌓아놓고 허물어 버리는 것은 손에 잡아도 흘러내리는 모래알 같은 그리움이었을까 푸드득 날아온 새들도 무엇인가 잊지못해 두리번거리다가 그리움의 부리로 찍어 향기를 마시고 구름이 서로 비켜서면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살이 이다지도 가슴 뜨거울 줄이야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빛이 있다면 내게도 반짝이는 별빛이 있다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 먼 하늘과 땅 사이 처럼 중년이 되어서도 아직까지 그곳에 닿지 못하는 높고 푸른 하늘같은 그리움이 있다 김홍성 시인 1954년 서울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84년 로 등단 시인이며, 오지 전문 잡지 기자 출신의 김홍성은 여행을 좋아하여 국내외의 아름다운 자연..

詩音律庭園 2019.10.26

조우 / 이훤

조우 / 이훤 잠시 머물렀다 가는 간이역이 되어도 좋다 그대, 부디 한 번만 정차하여라 이훤 조지아 공대 졸업, 동 대학원 석사 과정 휴학 중 2014년 신인상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 문화 월간지 에디터를 거쳐 사진작가, 칼럼니스트, 시인 틈틈이 개인 사진전과 공동전을 가졌으며 "Atlanta Photography Group" 멤버로 활동 중이며 웹진에 칼럼을 쓴다 시집 번역서 단편「정담(情談)의 향기」,「깨달음의 길」

詩音律庭園 2019.10.24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 신현림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 신현림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 모두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간다 멀어져서 아득하고 아름다운 너는 흰 셔츠처럼 펄럭이지 바람에 펄럭이는 것들을 보면 가슴이 아파서 내 눈 속의 새들이 아우성친다 너도 나를 그리워할까 분홍빛 부드러운 네 손이 다가와 돌려가는 추억의 영사기 이토록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구나 사라진 시간 사라진 사람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해를 보면 해를 닮고 너를 보면 쓸쓸한 바다를 닮는다 신현림 시인, 사진작가 경기도 의왕 아주대 국문과 졸업, 상명대 예술디자인대학원 비주얼아트 석사 1990년 『현대시학』에 「초록말을 타고 문득」외 9편의 시 발표 등단 199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의 한 사람으로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시인 1990..

詩音律庭園 2019.10.22

내 속의 가을 / 최영미

내 속의 가을 / 최영미 바람이 불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높고 푸른 하늘이 없어도 뒹구는 낙엽이 없어도 지하철 플랫폼에 앉으면 시속 100킬로로 달려드는 시멘트 바람에 기억의 초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흩어지는 창가에 서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따뜻한 커피가 없어도 녹아드는 선율이 없어도 바람이 불면 오월의 풍성한 잎들 사이로 수많은 내가 보이고 거쳐온 방마다 구석구석 반짝이는 먼지도 보이고 어쩌다 네가 비치면 그림자 밟아가며, 가을이다 담배연기도 뻣뻣한 그리움 지우지 못해 알미늄 샷시에 잘려진 풍경 한 컷, 우수수 네가 없으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팔짱을 끼고 가 - 을 최영미 시인, 소설가1961년, 서울 선일여고,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최영미 첫 시집 《서른, 잔치는 ..

詩音律庭園 2019.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