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音律庭園 139

가을밤 / 조용미

가을밤 / 조용미 마늘과 꿀을 유리병 속에 넣어 가두어두었다 두 해가 지나도록 깜박 잊었다 한 숟가락 뜨니 마늘도 꿀도 아니다 마늘이고 꿀이다 당신도 저렇게 오래 내 속에 갇혀 있었으니 형과 질이 변했겠다 마늘에 연하고 꿀에 연하고 시간에 연하고 동그란 유리병에 둘러싸여 마늘꿀절임이 된 것처럼 내 속의 당신은 참 당신이 아닐 것이다 변해버린 맛이 묘하다 또 한 숟가락 나의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 줄 마늘꿀절임 같은 당신을, 가을밤은 맑고 깊어서 방안에 연못 물 얇아지는 소리가 다 들어앉는다 1962년 경북 고령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 1990년 한길문학에등 발표 등단 시집 산문집 수상 2005년 제16회 김달진문학상 2020년 제20회 고산문학대상

詩音律庭園 2020.09.28

가을이 아름다운 건 / 이해인

가을이 아름다운 건 / 이해인 구절초 미타리 쑥부쟁이 꽃으로 피었기 때문이다 그리운 이름이 그리운 얼굴이 봄여름 해매던 연서들이 가난한 가슴에 닿아 열매로 익어갈 때 몇몇은 하마 낙엽이 되었으리라 온 종일 망설이던 수화기를 들면 긴 신호음으로 달려온 그대를 보내듯 끊었던 애잔함 뒹구는 낙엽이여 아, 가슴의 현이란 현 모두 열어 귀뚜라미 선율로 울어도 좋을 가을이 진정 아름다운 건 눈물 가득 고여오는 그대가 있기 때문이리

詩音律庭園 2020.09.26

9월의 기도 / 문혜숙

9월의 기도 / 문혜숙 나의 기도가 가을의 향기를 담아내는 국화이게 하소서 살아있는 날들을 위하여 날마다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한쪽 날개를 베고 자는 고독한 영혼을 감싸도록 따스한 향기가 되게 하옵소서 나의 시작이 당신이 계시는 사랑의 나라로 가는 길목이게 하소서 세상에 머문 인생을 묶어 당신의 말씀 위에 띄우고 넘치는 기쁨으로 비상하는 새 천상을 나는 날개이게 하소서 나의 믿음이 가슴에 어리는 강물이 되어 수줍게 흐르는 생명이게 하소서 가슴속에 흐르는 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로 마른 뿌리를 적시게 하시고 당신의 그늘 아래 숨쉬게 하옵소서 나의 일생이 당신의 손끝으로 집으시는 맥박으로 뛰게 하소서 나는 당신이 택한 그릇 복음의 사슬로 묶어 엘리야의 산 위에 겸손으로 오르게 하옵소서

詩音律庭園 2020.09.21

9월의 기도 / 강이슬

9월의 기도 / 강이슬 언뜻 스치는 한줄기 바람이 홀로 새벽을 깨울 때 텅 빈 가슴 내밀어 서늘한 기운으로 부풀게 하소서 한 여름내 무성했던 짙푸른 상념의 잎사귀들 가을빛 삭힌 단풍이게 하시어 그 빛깔로 내 언어를 채색하소서 숨 가쁜 땡볕의 흔적 길게 늘어진 그림자 추슬러 하늘거리는 햇볕 아래 알알이 고개 숙인 열매이게 하소서 저녁 풀벌레 소리 서늘한 여운으로 숲속에 들 때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 국화꽃잎 위에 이슬로 내리게 하소서 서러운 지난날의 기억들 해거름 석양이 드리울 제 노을빛 그리움으로 번지어 빈 들녘에 피어나는 연기 되게 하소서

詩音律庭園 2020.09.20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 / 천수호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 / 천수호 아버지는 다섯 딸 중나를 먼저 지우셨다 아버지께 나는 이름도 못 익힌 산열매 대충 보고 지나칠 때도 있었고아주 유심히 들여다 볼 때도 있었다 지나칠 때보다유심히 눌러볼 때 더 붉은 피가 났다 씨가 굵은 열매처럼 허연 고름을 불룩 터뜨리며아버지보다 내가 곱절 아팠다아버지의 실실한 미소는 행복해 보였지만아버지의 파란 동공 속에서 나는 파르르 떠는 첫 연인 내게 전에 없이 따뜻한 손 내밀며당신, 이제 당신 집으로 돌아가요, 라고 짧게 결별을 알릴 때 나는 가장 쓸쓸한 애인이 되어 내가 딸이었을 때의 미소를 버리고아버지 연인이었던 눈길로 아버지 마지막 손을 놓는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아버지 / 박강수아버지 / 김동아 Peter Paul..

詩音律庭園 2020.05.03

3월의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 / 이채

3월의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 / 이채 아침을 깨우는 3월의 봄 햇살이 당신의 고결한 눈망울 속에서 은빛 날개로 팔랑거릴 때 서둘러 커튼을 열어둔 창문 꽃병에 물을 채우고 한 아름 여린 봄꽃을 꽂아 봅니다 오늘만큼은 당신과 나 동화의 나라에서 꽃들과 새들과 숲 속의 오솔길을 거닐기로 해요 꿈처럼 구름처럼 훨훨 날아서 파아란 하늘까지 가 보기로 해요 언덕 너머 키 작은 풀꽃에서 아련한 첫 사랑의 향기가 불어옵니다 하늘 한 번 쳐다볼 사이 없이 땅 한 번 내려다볼 사이 없이 나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세월은 빠르고 쉬이 나이는 늘어갑니다 포기하고 잊어야 했던 지난날이 오랜 일기장에서 쓸쓸히 추억으로 저물어가고 있어도 오늘만큼은 당신과 나 나폴나폴 나비의 날개에 실려 꽃바람과 손잡고 봄 나들이를 하기로 해요 메기..

詩音律庭園 2020.03.07

따뜻한 그리움 / 김재진

따뜻한 그리움 / 김재진 찻잔을 싸안듯 그리움도 따뜻한 그리움이라면 좋겠네 생각하면 촉촉이 가슴 적셔오는 눈물이라도 그렇게 따뜻한 눈물이라면 좋겠네 내가 너에게 기대고 또 네가 나에게 기대는 풍경이라도 그렇게 흐뭇한 풍경이라면 좋겠네 성에 낀 세상이 바깥에 매달리고 조그만 입김 불어 창문을 닦는 그리움이라도 모락모락 김 오르는 그리움이라면 좋겠네 김재진 시인 1955년 대구 출생, 계명대학교 졸업 1976년 영남일보 '외로운 식물의 꿈' 등단 1993년 조선일보에 소설 당선 시인, 에세이스트, 소설가 유나방송(음악방송) 대표 , KBS PD 시집(저서)

詩音律庭園 2020.03.05

나 하나 꽃피어 / 조동화

나 하나 꽃피어 / 조동화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은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조동화 시인 경북 구미 영남대 문리대 국문과 197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5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2003년 이호우 시조 문학상 2005년 경상북도 문화상 2010년 유심작품상 시조부문 시집 『낙화암』,『산성리에서』, 『처용 형님과 더불어』 『강은 그림자가 없다』, 『낮은 물소리』, 『눈 내리는 밤』 『영원을 꿈꾸다』 1976 ~ 1999 경주문화중고등학교 교사 199..

詩音律庭園 2020.03.05

봄이 오는 길목에서 / 이해인

봄이 오는 길목에서 / 이해인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 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 내 마음엔 조금씩 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 꽃을 피우고 싶어 온몸이 가려운 매화 가지에도 아침부터 우리집 뜰 안을 서성이는 까치의 가벼운 발걸음과 긴 꼬리에도 봄이 움직이고 있구나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내 마음이 바위 틈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어서는 봄과 함께 내가 일어서는 봄 아침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보는 사람들이 모두 새롭고 소중하여 고마움의 꽃망울이 터지는 봄 봄은 겨울에도 숨어서 나를 키우고 있었구나

詩音律庭園 2020.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