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音律庭園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 / 천수호

음악듣는남자 2020. 5. 3. 22:40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 / 천수호 
아버지는 다섯 딸 중
나를 먼저 지우셨다  
아버지께 나는 이름도 못 익힌 산열매   
대충 보고 지나칠 때도 있었고
아주 유심히 들여다 볼 때도 있었다   
지나칠 때보다
유심히 눌러볼 때 더 붉은 피가 났다   
씨가 굵은 열매처럼 허연 고름을 불룩 터뜨리며
아버지보다 내가 곱절 아팠다
아버지의 실실한 미소는 행복해 보였지만
아버지의 파란 동공 속에서 나는 파르르 떠는 첫 연인   
내게 전에 없이 따뜻한 손 내밀며
당신, 이제 당신 집으로 돌아가요, 라고 짧게 결별을 알릴 때   
나는 가장 쓸쓸한 애인이 되어  
내가 딸이었을 때의 미소를 버리고
아버지 연인이었던 눈길로   
아버지 마지막 손을 놓는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아버지 / 박강수
아버지 / 김동아






 
Peter Paul Rubens (1577~1640)
위의 그림은 17세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독일 태생의  벨기에 화가인
Peter Paul Rubens가 그린 [Roman Charity]라는 유화 작품들로 
부제는[Simon and Pero]인데, 아래쪽 그림은 1612년에 그린 것이고
당시 거센 퇴폐성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위쪽 그림은 1630년에 그렸는데 그의 사후
바로크 양식화의 수작으로 통하며 Rubens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고대 로마시대의 작가 Valerius Maximus가 
민담과 소문을 엮어 만든 <로마의 기억할 만한 언행들>이라는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로마에 <시몬>이라는 노인이 있었는데 역모죄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사형 방식은 음식을 전혀 주지 않고 감옥에서 굶겨 죽이는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이 노인에게는 <페로>라는 이름을 가진 딸이 있는데 
감옥에서 죽음을 앞둔 아버지 면회를 가게 됩니다
아버지를 찾아가는 딸은 쇠약할대로 쇠약해진 아버지의 입에 뭐라도 넣어주고 싶었지만 
아버지 시몬은 굶어 죽어야 하는 벌을 받고 있었으므로 음식제공은 금지되어 있었기에
그녀는 빈손으로 면회를 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다가
때마침 아이를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젖이 충분히 불어 있었기에
간수들의 눈을 피해 오직 아버지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물리는데, 이 그림들은 힘없이 젖을 빠는 앙상한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흐르는 눈물이 그의 얼굴을 적시는 안타까운 사연을 화폭에 옮긴 그림입니다
그녀는 면회할 때마다 간수들의 눈치를 보며 아버지에게 젖을 먹여
아버지가 굶어 죽는 일을 그렇게 해서 조금씩 연장해 갑니다
시몬이 죽을 때가 지났음에도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자
재판부는 간수들에게 부녀의 동태를 은밀히 감시하라고 이릅니다
어둡고 습한 감옥에서 딸이 아버지에게 젖을 물리는 모습을 본 간수들은 
이 충격적인 모습을 재판부에 보고합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재판부는 <공적 규범과 혈연의 의무 사이>의 상반된 가치를 두고 
고민한 끝에 마침내 시몬을 풀어주라는 판결을 내리게 되고
아버지 시몬은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다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기독교와 금욕주의가 있어서 소재가 제한되어 있었는데
이런 저런 다양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화가들에게는 이 소재가 마음에 들었기에
시몬과 페로의 이야기는 다양한 그림과 조각상 등으로 표현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Rubens가 그린 이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평은 
외설적이다, 퇴폐적이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당시  Rubens가 37살이나 어린 아내와 재혼한지 얼마 안된데다
그림 속 노인과 여인의 모습은  Rubens와  Rubens의 아내와 비슷하여 
사람들은  Rubens의 성적 욕망을 작품에 투영했다는 의견이 이어졌고
이로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Rubens는 지방으로 낙향해 
어둡고 쓸쓸한 풍경화를 그리디가 
1640년 아무도 찾지 않는 집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습니다
그런데 Rubens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Roman Charity]는
그의 사후에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는데 강렬한 색채 대립을 통해 
이미지를 형상화 했다는 평가와 함께 Rubens의 대표작 중 하나로 인정 받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Rubens가 1617년에 그린 드로잉 작품으로
"A Man in Korean Costume, 한복을 입은 남자"입니다
*** 편집 : 윤슬 성두석 ***




 

천수호 시인
1964년 경북 경산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독특한 제목의 <옥편에서 미꾸라지 추(鰍)자 찾기>가
당선되면서 39살 늦은 나이에 등단합니다
등단 후 <아주 붉은 현기증>과 <우울은 허밍>이라는 
2권의 시집을 내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어머니와 함께 시를 엮은 시집 <저 산 간다 저 산 잡아라>를 펴내 화제를 낳았습니다
이 시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는 
2014년에 출간한 시집 <우울한 허밍>에 실려 있습니다
현재 명지대와 단국대 출강 중입니다
*** 편집 : 윤슬 성두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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