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音律庭園 139

9월이 오면 / 김향기

9월이 오면 / 김향기 웃자라던 기세를 접는 나무며 곡식들, 잎마다 두텁게 살이 찌기 시작하고 맑아진 강물에 비친 그림자도 묵직하다 풀벌레 노래 소리 낮고 낮게 신호 보내면 목청 높던 매미들도 서둘러 떠나고 들판의 열매들마다 속살 채우기 바쁘다 하늘이 높아질수록 사람도 생각 깊어져 한줄기 바람결에서 깨달음을 얻을 줄 알고, 스스로 철들어가며 여물어 가는 9월 김향기 시조 시인 1957년 전북 고창 출생 1993년 [창조문학] 신인상 시조 당선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 회원 하나로 선「사상과 문학」작가회의 이사 미당문학 충남지역위원장, 천안문협 부지부장 시조 시집 『보리 익을 무렵』

詩音律庭園 2022.09.13

구월의 시 / 조병화

구월의 시 / 조병화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의 여름만큼 무거워지는 법이다 스스로 지나온 그 여름만큼 그만큼 인간은 무거워지는 법이다 또한 그만큼 가벼워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그 가벼움만큼 가벼이 가볍게 가을로 떠나는 법이다 기억을 주는 사람아 기억을 주는 사람아 여름으로 긴 생명을 이어주는 사람아 바람결처럼 물결처럼 여름을 감도는 사람아 세상사 떠나는 거 비치파라솔은 접히고 가을이 온다 고독의 시인 조병화(1921 - 2003) 경기도 안성 출생. 호는 편운(片雲) 경성사범학교 보통과 졸업, 1943년 연습과 졸업 1945년 동경고등사범학교 3학년 재학 중 일본의 패전으로 귀국 1945년 9월 경성사범학교 교유, 인천중학교 교사, 서울중학교 교사로 재직 1959년부터 경희대 교수, 1981년부터 인하대 교수..

詩音律庭園 2022.09.01

내가 가장 아프단다 / 유안진

내가 가장 아프단다 / 유안진 나는 늘 사람이 아팠다 나는 늘 세상이 아팠다 아프고 아파서 X-ray, MRI, 내시경 등등으로 정밀진단을 받았더니 내 안에서도 내 밖에서도 내게는, 나 하나가 너무 크단다 나 하나가 너무 무겁단다 나는 늘, 내가 너무 크고 너무 무거워서 잘못 아프고 잘못 앓는단다 나 말고 나만큼 나를 피멍들게 한 누가 없단다 나 말고 나만큼 나를 대적한 누가 없단다 나 말고 나만큼 나를 사랑한 누가 없단다 나 말고 나만큼 나를 망쳐준 누가 없단다 나 말고 나만큼 내 세상을 배반한 누가 없단다 나는 늘 나 때문에 내가 가장 아프단다 유안진 시인 1941년 경북 안동 서울대학교 교육학 서울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심리학 석사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 박사 1965, 1966, 1967년 3회에 걸..

詩音律庭園 2020.10.27

사랑, 그 뒤에 오는 그림자를 / 김옥란

사랑, 그 뒤에 오는 그림자를 / 김옥란 사랑, 그 뒤에 오는 그림자를 보지 못했네 달콤하게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솜사탕처럼 환희에 젖어오는 몽롱한 꿈결 같은 느낌으로만 그대를 사랑했네 아, 하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그림자를 나 미처 보지 못했네 그대 그리워하는 마음으로만 마냥 기쁨인 줄 알았네 내게 속삭이는 별빛 같은 영롱한 언어로만 난 취해 있었네 당신이 들려주는 사랑의 유희에 난 마냥 젖어들고 말았었네 그 뒤에 따라오는 그림자는 전혀 생각지 못했었네 아, 사랑의 양면의 얼굴을 난 미처 알지 못했었네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무도회의 왕자처럼 그대는 그렇게 내 마음 뺏어가 버렸었네 그대의 동작 하나 하나에 난 넋을 잃었었네 당신이 떠나야 할 때를 알지 못했었네 새벽닭이 울고 훤하게 날이 밝을 무렵엔 ..

詩音律庭園 2020.10.22

가을 들녘에 서서 / 홍해리

가을 들녘에 서서 / 홍해리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홍해리 시인 1942년 충북 청주 출생 1964년 고려대 영문과 졸업 청주 세광고, 청주상고, 서울 동덕여고 등에서 영어 교사로 36년 동안 교편 생활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 초대 및 2대 이사장 역임 월간《우리詩》 대표 1969년 시집 『투망도投網圖』로 등단함 2020년 26번째 시집 『정곡론』출간 시집 『투망도投網圖』 『화사기花史記』 『무교동武橋洞』 『우리 들의 말』 『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 『대추꽃 초록 빛』 『청별淸別』 『은자의 북』 『난초밭 일궈 놓고』 『투명 한 슬픔』 『애란愛蘭』 『봄, 벼락치..

詩音律庭園 2020.10.16

허수아비 1 / 신달자

허수아비 1 / 신달자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외로우냐고 묻지 마라 어떤 풍경도 사랑이 되지 못하는 빈 들판 낡고 해진 추억만으로 한 세월 견뎌왔느니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누구를 기다리느냐고도 묻지 마라 일체의 위로도 건네지 마라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을 마음속에 섬기는 일은 어차피 고독한 수행이거니 허수아비는 혼자라서 외로운게 아니고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외롭다 사랑하는 그만큼 외롭다

詩音律庭園 2020.10.15

가을의 시 / 김옥림

가을의 시 / 김옥림 가을엔 단풍에 고이 적어 보낸 어느 이름 모를 산골 소녀의 사랑의 시가 되고 싶다 가을엔 눈 맑은 새가 되어 뒷동산 오솔길 풀잎 위의 아침 이슬 머금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햇푸른 사랑의 노래이고 싶다 가을엔 눈빛 따스한 햇살이 되어 시월 들판을 풍요롭게 하는 대자연의 너그러운 숨결이고 싶다 가을엔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를 용서하고 모두와 화해하고 잊혀져간 소중한 이름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해맑은 기도를 드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간절한 열망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가을엔 나보다 더 외로운 이들에게 따스한 가슴으로 다가가 그들의 야윈 손을 잡아주고 싶다 가을은 겸손과 감사의 계절 가을은 풍요와 사랑의 계절 가을엔 그 모두에게 읽혀지고 기억되어지는 사랑의 시가 되고 싶다 이 시는 독자들..

詩音律庭園 2020.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