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音律庭園 139

사랑의 시차 / 최영미

사랑의 시차 / 최영미 내가 밤일 때 그는 낮이었다 그가 낮일 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것이 우리 죄의 전부였지 나의 아침이 너의 밤을 용서 못하고 너의 밤이 나의 오후를 참지 못하고 안녕이란 말도 없이 우리는 헤어졌다 피로를 모르는 젊은 태양에 눈멀어 제 몸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선창가를 서성이며 백야의 황혼을 잡으려 했다 내 마음 한켠에 외로이 떠 있던 백조는 여름이 지나도 떠나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도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그리고 가을, 그리고 겨울 곁에 두고도 가고 오지 못했던 너와 나, 면벽한 두 세상

詩音律庭園 2019.06.24

별까지는 가야 한다 / 이기철

별까지는 가야 한다 / 이기철 우리 삶이 먼 여정일지라도 걷고 걸어 마침내 하늘까지는 가야 한다 닳은 신발 끝에 노래를 달고 걷고 걸어 마침내 별까지는 가야 한다 우리가 깃들인 마을엔 잎새들 푸르고 꽃은 칭찬하지 않아도 향기로 핀다 숲과 나무에 깃든 삶들은 아무리 노래해도 목쉬지 않는다 사람의 이름이 가슴으로 들어와 마침내 꽃이 되는 걸 아는 데 나는 쉰 해를 보냈다 미움도 보듬으면 노래가 되는 걸 아는 데 나는 반생을 보냈다 나는 너무 오래 햇볕을 만졌다 이제 햇볕을 뒤로 하고 어둠 속으로 걸어가 별을 만져야 한다 나뭇잎이 짜 늘인 그늘이 넓어 마침내 그것이 천국이 되는 것을 나는 이제 배워야 한다 먼지의 세간들이 일어서는 골목을 지나 성사(聖事)가 치러지는 교회를 지나 빛이 쌓이는 사원을 지나 마침내..

詩音律庭園 2019.06.22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 최승자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 최승자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

詩音律庭園 2019.06.17

사랑이 서 있다 / 푸른솔

사랑이 서 있다 / 푸른솔 이쁘다 너무 이쁘다 널 사랑하는 내 마음이 이쁘고 날 사랑하는 네 마음이 이쁘다 사랑스럽다 너무 사랑스럽다 널 아끼는 내 가슴이 사랑스럽고 날 아끼는 네 가슴이 사랑스럽다 고맙다 너무 고맙다 널 그리워하는 내 심장이 고맙고 날 그리워하는 네 심장이 고맙다 사랑이 서 있다 내 가슴 닿는 거기에 내 사랑이 서 있다 숨소리가 들리는 그 곳에

詩音律庭園 2019.06.15

당신이 내 연인이라면 / 이채

당신이 내 연인이라면 / 이채 당신이 내 연인이라면 당신이 갖고 싶다는 사랑을 나는 날마다 이슬로 빚어 새벽 하늘이 내린 청초한 풀잎의 맑음이고 싶습니다 풀잎에 서린 촉촉한 기운 위로 솜털같은 햇살이 내리고 세상의 풀들이 파르르 눈을 뜨면 한줌 가슴으로 하루를 담아 당신의 창을 깨우는 아침으로 서겠습니다 당신이 내 연인이라면 당신이 예쁘다는 꽃으로 피어 나는 날마다 당신의 정원에 삶의 향기를 뿌리는 한 떨기 아름다운 몸짓이고 싶습니다 꽃잎에 물든 향긋한 미소로 꽃바람을 부르고 나비를 불러 모아 꿀처럼 달콤한 행복을 만들어 소중한 당신의 가슴에 소복히 담겠습니다 당신이 내 연인이라면 당신이 그립다던 밤하늘의 별이 되어 지친 하루의 문을 닫고 잠이 든 당신의 창에 다가가 휴식의 평온한 어둠을 비추는 고요함이..

詩音律庭園 2019.05.24

오월의 숲에 들면 / 김금용

오월의 숲에 들면 / 김금용 어지러워라 자유로워라 신기가 넘쳐 눈과 귀가 시끄러운 오월의 숲엘 들어서면 까치발로 뛰어다니는 딱따구리 아기 새들 까르르 뒤로 넘어지는 여린 버드나무 잎새들 얕은 바람결에도 어지러운 듯 어깨로 목덜미로 쓰러지는 산딸나무 꽃잎들 수다스러워라 짓궂어라 한데 어울려 사는 법을 막 터득한 오월의 숲엘 들어서면 물기 떨어지는 햇살의 발장단에 맞춰 막 씻은 하얀 발뒤꿈치로 자박자박 내려가는 냇물 산사람들이 알아챌까봐 시침떼고 도넛처럼 꽈리를 튼 도롱뇽 알더미들 도롱뇽 알더미를 덮어주려 합세하여 누운 하얀 아카시 찔레 조팝과 이팝꽃 무더기들 홀로 무너져 내리는 무덤들조차 오랑캐꽃과 아기똥풀 꽃더미에 쌓여 푸르게 제 그림자 키워가는 오월의 숲 몽롱하여라 여울져라 구름밭을 뒹굴다 둥근 얼굴이..

詩音律庭園 2019.05.06

사랑이 두려운 아들에게 / 홍수희

사랑이 두려운 아들에게 / 홍수희 처음부터 사랑은 완벽이 아니었단다 처음부터 사랑은 완전이 아니었단다 부족함을 극복하는 과정이 사랑이란다 부족함을 극복하는 여정旅程이 성숙이란다 이 빠진 동그라미처럼 불완전한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의 불완전한 조각으로 서로의 불완전한 동그라미를 메워주는 누덕누덕 누더기 같은 인생의 수레바퀴가 사랑이란다 기억해라, 아들아 사랑은 완벽이 아니라 극복이란다

詩音律庭園 2019.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