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音律庭園 139

어느 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 유 하

어느 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 유 하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그대가 오리라 바람도 찾지 못하는 그곳으로 안개비처럼 그대가 오리라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모래알들은 밀알로 변하리라 그러면 그 밀알로, 나 그대를 위해 빵을 구우리 그대 손길 닿는 곳엔 등불처럼 꽃이 피어나고 메마른 날개의 새는 선인장의 푸른 피를 몰고 와 그대 앞에 달콤한 비 그늘을 드리우리 가난한 우리는 지평선과 하늘이 한 몸인 땅에서 다만 별빛에 배부르리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빗방울처럼 그대가 오리라 그러면 전갈들은 꿀을 모으고 낙타의 등은 풀잎 가득한 언덕이 되고 햇빛 아래 모래알들은 빵으로 부풀고 독수리의 부리는 썩은 고기 대신 꽃가루를 탐하리 가난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세상이란 오직 이것 뿐..

詩音律庭園 2019.02.18

꽃 / 김춘수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詩音律庭園 2019.02.17

따뜻한 안부 / 박복화

따뜻한 안부 / 박복화 지금 그대 춥거던 내 마음을 입으시라 내복 같은 내 마음을 입으시라 우리의 추운 기억들은 따뜻한 입김으로 부디 용서하시라 당신과 나의 거리가 차라리 유리창 하나로 막혀 빤히 바라볼 수 있다면 좋으리 차가운 경계를 사이에 두고 언 손 마주 대고 있어도 좋으리 성에를 닦아내듯 쉽게 들여다보이는 안팍이면 좋으리 시린 발바닥에 다시 살얼음이 티눈으로 박히는 계절 한 뼘의 고드름을 키우는 바람소리 깊어지면 눈빛 하나로 따스했던 그대만 나는 기억하리 나조차 낯설어지는 시간 스스로 기다림의 박제가 되는 저녁 입술이 기억하지 못하는 절실한 그대의 안부 지금 내 마음처럼 그대 춥거던 이 그리움을 입으시라 ********************** 박복화 시인은 부산 출생으로 2003년 12월 "매향..

詩音律庭園 2019.02.14

내 가슴 빈터에 네 침묵을 심는다 / 김정란

내 가슴 빈터에 네 침묵을 심는다 / 김정란 네 망설임이 먼 강물소리처럼 건네왔다 네 참음도 네가 겸손하게 삶의 번잡함 쪽으로 돌아서서 모르는 체하는 그리움도 가을 바람 불고 석양녘 천사들이 네 이마에 가만히 올려놓고 가는 투명한 오렌지빛 그림자도 그 그림자를 슬프게 고개 숙이고 뒤돌아서서 만져보는 네 쓸쓸한 뒷모습도 밤새 네 방 창가에 내 방 창가에 내리는, 내리는, 차갑고 투명한 비도 내가 내 가슴 빈터에 네 침묵을 심는다, 한 번, 내 이름으로 너는 늘 그렇게 내게 있다 세계의 끝에서 서성이는 아득히 미처 다 마치지 못한 말로 네게 시간을 줘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쓴다, 내 가슴 빈터에 세계가 기웃, 들여다보고 제 갈 길로 가는 작은, 후미진 구석 그곳에서 기다림을 완성하려고 지금, 여기에서, 네 ..

詩音律庭園 2019.02.13

사랑 / 김상미

사랑 / 김상미 그는 남쪽에 있다 남쪽 창을 열어놓고 있으면 그가 보인다 햇빛으로 꽉 찬 그가 보인다 나는 젖혀진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젖혀진 내 목에서 붉은 꽃들이 피어난다 붉은 꽃들은 피어나면서 사방으로 퍼진다 그의 힘이다 그는 남쪽에 있다 그에게로 가는 수많은 작은 길들이 내 몸으로 들어온다 몸에 난 길을 닦는 건 사랑이다 붉은 꽃들이 그 길을 덮는다 새와 바람과 짐승들이 그 위를 지나 다닌다 시작과 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남쪽에 있다

詩音律庭園 2019.02.11

내가 여전히 나로 남아야 함은 / 김기만

내가 여전히 나로 남아야 함은 / 김기만 끝없는 기다림을 가지고도 견뎌야만 하는 것은 서글픈 그리움을 가지고도 살아야만 하는 것은 소망 때문이요 소망을 위해서이다 그대 사랑하고 부터 가진게 없는 나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며 보냈던 많은 날 가을 하늘에 날리는 낙엽처럼 내겐 참 많은 어둠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내가 여전히 나로 남아야 함은 아직도 널 사랑하기 때문이요 내가 잊어버릴 수 있는 계절을 아직 만나지 못한 까닭이요 그리고 뒤돌아 설 수 있는 뒷모습을 아직 준비하지 못한 까닭이다

詩音律庭園 2019.02.10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 박정대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 박정대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 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詩音律庭園 2018.12.06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하네 / 박정대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하네 / 박정대 나 집시처럼 떠돌다 그대를 만났네 그대는 어느 먼 길을 걸어왔는지 바람이 깎아놓은 먼지조각처럼 길 위에 망연히 서 있었네 내 가슴은 푸른 샘물 한 줌으로 그대 메마른 입술 축여 주고 싶었지만 아, 나는 집시처럼 떠돌다 어느 먼 옛날 가슴을 잃어버렸다네 가슴 속 푸른 샘물도 내 눈물의 길을 따라 바다로 가버렸다네 나는 이제 너무 낡은 기타 하나만을 가졌네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한다네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기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면 가웅, 가웅, 나의 기타는 추억의 고양이 소리를 낸다네 떨리는 그 소리의 가여운 밀물로 그대 몸의 먼지를 날려버릴 수만 있다면 이 먼지 나는 길 위에서 그대는 한 잎의 푸른 음악으로 다시 돋아날 수도 있으련만 나 ..

詩音律庭園 2018.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