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音律庭園 139

이 밤도 그대를 보고싶어 애태우는 / 이정하

이 밤도 그대를 보고싶어 애태우는 / 이정하 내 사는 곳에서 바람 불어오거든 그대여 그대가 그리워 흔들리는 내 마음인 줄 아십시요 내 사는 곳에서 유난히 별빛 반짝이거든 그대여, 이 밤도 그대를 보고 싶어 애태우는 내 마음인 줄 아십시요 그대여 내 사는 곳에서 행여 안개가 밀려오거든 그대를 잊고자 몸부림치는 내 마음인 줄 아십시요 내 아픈 마음인 줄 아십시요

詩音律庭園 2008.04.20

네 영혼의 중앙역 / 박정대

네 영혼의 중앙역 / 박정대 키냐르, 키냐르 부르지 않아도 은밀한 생은 온다 음악처럼, 문지방처럼, 저녁처럼 네 젖가슴을 흔들고 목덜미를 스치며 네 손금의 장강 삼협을 지나 네 영혼의 울타리를 넘어, 침묵의 가장자리 그 딱딱한 빛깔의 시간을 지나 욕망의 가장 선연한 레일 위를 미끄러지며 네 육체의 중앙역으로 은밀한 생은 온다 저녁마다 너를 만나던 이 지상의 물고기 자리에서 나는 왜 네 심장에 붙박이별이 되고 싶었는지 네 기억의 붉은 피톨마다 은빛 비늘의 지문을 남기고 싶었는지 내가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한 마리 외로운 몸짓으로 네 몸을 거슬러 오를 때도 내 영혼은 왜 또 다른 생으로의 망명을 꿈꾸고 있었던 것인지 생이 더 이상 생일 수 없는 곳에서, 생이 그토록 생이고만 싶어하는 곳에서 부르지 않아도 은..

詩音律庭園 2008.03.16

봄 / 이성부

봄 /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詩音律庭園 2008.03.10

너무 많이 사랑해버린 아픔 / 김동규

너무 많이 사랑해버린 아픔 / 김동규 딱, 고만큼만 사랑하려 했었다 때로는 잊고 살고 그러다 또 생각나고 만나서 차 마시고, 이따금 같이 걷고 그리울 때도 있지만 참을 수 있을 만큼 고만큼만 사랑하리 생각했었다 더 주지도 말고 더 받지도 말고 더 주면 돌려받고 더 받으면 반납하고 마음 안에 그어 놓은 눈금 바로 아래만큼만 나는 너를 채워두리 마음먹었었다 우연히 주고받은 우리들의 생각들이 어쩌면 그리도 똑같을 수 있느냐고 약속한 듯 마주보며 행복하게 웃을 만큼 고만큼만 너를 사랑하려 했었다 너의 안부 며칠째 듣지 못해도 펄펄 끓는 열병으로 앓아눕지 않을 만큼 고만큼만 나는 너를 사랑하려 했었다 딱, 고만큼만 딱, 고만큼만

詩音律庭園 2008.02.24

한 사람을 사랑했네 1 / 이정하

한 사람을 사랑했네 1 / 이정하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내 길보다 자꾸만 다른 길을 기웃거리고 있었네 함께 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내 인생 전체를 삼키고도 남게 했던 사람 만났던 날보다 더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했던 사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함께 죽어도 좋다 생각한 사람 세상의 환희와 종말을 동시에 예감케 했던 한 사람을 사랑했네 부르면 슬픔으로 다가 올 이름 내게 가장 큰 희망이었다가 가장 큰 아픔으로 저무는 사람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기에 붙잡지도 못했고 붙잡지 못했기에 보낼 수도 없던 사람 이미 끝났다 생각하면서도 길을 가다 우연히 라도 마주치고 싶은 사람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한 사람을 사..

詩音律庭園 2008.02.06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 도종환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 도종환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하나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서둘러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채워간다는 것입니다 비어 있어야 비로소 가득해지는 사랑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몸 한 쪽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아 골짝을 빠지는 산 울음소리로 평생을 떠돌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흙에 묻고 돌아보는 이 땅 위에 그림자 하나 남지 않고 말았을 때 바람 한 줄기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모두 크고 작은 사랑의 아픔으로 절망하고 뉘우치고 원망하고 돌아서지만 사랑은 다시 믿음 다시 참음 다시 기다림 다시 비워두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

詩音律庭園 2008.02.02

그 사람의 살내음을 기억하니? / 배은미

그 사람의 살내음을 기억하니? / 배은미 꼬냑의 섬세한 향처럼 허브의 미묘한 향처럼 깊고 그윽한 사랑을 해야지 가을날의 아림처럼 겨울날의 시림처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랑을 해야지 치열함 뒤 숨겨진 살내음 같이 사각거리는 가장 오래 각인되는 향기로 나 아니면 안되는 그런 사랑을 해야지 이별이 왜 어려운지 아니? 그 사람 살내음을 기억하기 때문이야 그건 기억이 아니라 각인되는 거거든

詩音律庭園 2008.01.29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운 색채를 드리우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

詩音律庭園 2008.01.22

젖지 않는 마음 / 나희덕

젖지 않는 마음 / 나희덕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내 마음 시린 줄도 모르고 비에 젖었습니다 젖는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詩音律庭園 2008.01.22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

詩音律庭園 2008.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