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音律庭園 139

삶을 무엇이라 이름 붙일까 / 권대웅

삶을 무엇이라 이름 붙일까 / 권대웅 진달래 분홍 꽃 이름을 '문득'이라 불러본다 어느 한적한 골목길에 피어난 목련꽃을 ‘홀연’이라 이름 붙여본다 담장에 삐쭉 나오는 개나리를 '불현듯'이라 불러본다 봄밤에 핀 벚꽃을 '와락'이라 불러본다 그렇게 문득, 홀연, 불현듯, 와락, 봄꽃이 왔다 저 꽃을 기다렸던 모든 것들과 저 꽃을 차마 보지 못하고 간 것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올봄 통풍처럼 불어오며 기억을 아프게 할 바람을 ‘화들짝’이라 부르자 비틀거리며 간신히 내려오는 햇빛 한 줌을 ‘울컥’이라고 부르자 저 생에서 날아오는 새들을 ‘속절없이’라고 부르자 지평선 너머 먼 구름을 ‘멍하니’라고 부르자 그 구름을 바라보고 울고 있는 당신을 ‘하염없이’라고 부르자 지나간 그 겨울을 ‘우두커니’라고 부르자 겨울을..

詩音律庭園 2018.08.18

삶을 문득이라 부르자 / 권대웅

삶을 문득이라 부르자 / 권대웅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오전 낯선 골목길 담장 아래를 걷다가 누군가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는 순간, 내가 저 꽃나무였고 꽃나무가 나였던 것 같은 생각 화들짝 놀라 꽃나무 바라보는 순간 짧게 내가 기억나려던 순간 아, 햇빛은 어느새 비밀을 잠그며 꽃잎 속으로 스며들고 까마득하게 내 생은 잊어버렸네 낯선 담장집 문틈으로 기우뚱 머뭇거리는 구름 머나 먼 하늘 언젠가 한 번 와 본 것 같은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고요한 골목길 문득 바라보니 문득 피었다 사라져버린 꽃잎처럼 햇빛 눈부신 봄날, 문득 지나가는 또 한 생이여 * 원작과는 달리 행과 연은 제가 임의로 나누어 시인님에게 죄송합니다 ** image 출처 : 비바윤정 / 대동골목 / http://vivayoonjeong.t..

詩音律庭園 2018.08.17

나는 가끔 / 박복화

가끔 / 박복화 때때로 나는 비 내리는 쓸쓸한 오후 커피향 낮게 깔리는 바다 한 모퉁이 카페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듯 내 삶의 밖으로 걸어 나와 방관자처럼 나를 바라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까닭 없이 밤이 길어지고 사방 둘러 싼 내 배경들이 느닷없이 낯설어서 마른기침을 할 때 나는 몇 번이고 거울을 닦았다 어디까지 걸어 왔을까 또 얼만큼 가야 저녁노을처럼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될까 세월의 흔적처럼 길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낡은 수첩을 정리하듯 허방 같은 욕심은 버려야지 가끔 나는 분주한 시장골목을 빠져 나오듯 내 삶의 밖으로 걸어 나와 혼자이고 싶을 때가 있었다

詩音律庭園 2010.10.30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멜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詩音律庭園 2010.03.14

네가 보고싶어 난 너에게 간다 / 김정한

네가 보고싶어 난 너에게 간다 / 김정한 네가 보고 싶다 그래서 난 너에게 간다 배고픈 사랑 안고 너에게 간다 네가 없어 너를 만나지 않아도 뿌리 내린 믿음 하나로 너의 사랑 하나로 난 만족한다 네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는 말이 하늘을 가득 채운다 너를 향해 간다 길 위에 난 발자국을 보아도 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넌 은행나무 아래서 나를 기다린다 난 너의 기다림 하나로 행복하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속에 담아둔 네 얼굴에 난 항상 취하고 만다 네가 보고플 땐 언제나 거울처럼 널 끄집어 내 볼 수가 있다 널 기다리는 동안 쌍계사 깊은 산자락에 얼굴 파묻는 슬픈 석양의 마지막 모습을 가슴에 담는다 너를 내 맘에 담듯이 넌 언제나 푸른 물빛으로 황금빛의 눈부신 햇살로 나를 기다린다 너를 만나면 난 살고 있다는..

詩音律庭園 2008.11.13

이별 / 도종환

이별 / 도종환 당신이 처음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는 이것이 이별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내 안에 있고 나 또한 언제나 당신이 돌아오는 길을 향해 있으므로 나는 헤어지는 것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꾸 함께 있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이것이 이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별은 떠날 때의 시간이 아니라 떠난 뒤의 길어지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인가 합니다 당신과 함께 일구다 만 텃밭을 오늘도 홀로 갈다 돌아옵니다 저물어 주섬주섬 짐들을 챙겨 돌아오면서 나는 아직도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당신이 비록 내 곁을 떠나 있어도 떠나가던 때의 뒷모습으로 서 있지 않고 가다가 가끔은 들풀 사이에서 뒤돌아보던 모습으로 오랫동안 내 뒤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헤어져 있는 시간이 이렇게 길..

詩音律庭園 2008.06.23

그리운 이에게 / 나해철

그리운 이에게 / 나해철 사랑한다고 말할 걸 오랜 시간이 흘러가 버렸어도 그리움은 가슴 깊이 박혀 금강석이 되었다고 말할 걸 이토록 외롭고 덧없이 홀로 선 벼랑 위에서 흔들릴 줄 알았더라면 세상의 덤불가시에 살갗을 찔리면서라도 내 잊지 못한다는 한 마디 들려줄 걸 혹여 되돌아오는 등 뒤로 차고 스산한 바람이 떠밀고 가슴을 후비었을지라도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사랑이 꽃같이 남아 있다고 고백할 걸 그리운 사람에게

詩音律庭園 2008.06.09

오월의 숲속에선 저절로 일렁이네 / 고재종

오월의 숲속에선 저절로 일렁이네/고재종 비 오고 활짝 개인 날인데도 오늘은 우체부조차 오지 않는 이 쓸쓸한 자리보전, 떨치고 뒷산 숲 속에 드니 일렁이는 게 생생한 바람인지 제 금보석을 마구 뿌리는 햇살인지 온갖 젖은 초록과 상관하는 것인데 은사시, 자작나무는 차르르 차르르 개느삼, 수수꽃다리는 흐느적흐느적 왕머루, 청미래덩굴은 치렁치렁 일렁이는 것이 당연할 뿐, 여기서 제 모자란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랑이여, 나 저절로 일렁이네 오월 숲에선 뻐꾸기 한나절 호곡도 가슴 깊숙이 녹아내릴 뿐 세상은 너무 억울하지도 않네 그렇다네, 세월이 잠깐 비껴난 숲에서 일렁이는 것들이 진저리치다 산 꿩의 썽썽한 목청을 틔울 때 사랑이여, 난 이 지상의 외로움 조팝꽃 그 쌀알수만큼은 녹이겠네 아니아니 또르르륵 또르..

詩音律庭園 2008.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