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音律庭園
오월의 숲속에선 저절로 일렁이네/고재종 비 오고 활짝 개인 날인데도 오늘은 우체부조차 오지 않는 이 쓸쓸한 자리보전, 떨치고 뒷산 숲 속에 드니 일렁이는 게 생생한 바람인지 제 금보석을 마구 뿌리는 햇살인지 온갖 젖은 초록과 상관하는 것인데 은사시, 자작나무는 차르르 차르르 개느삼, 수수꽃다리는 흐느적흐느적 왕머루, 청미래덩굴은 치렁치렁 일렁이는 것이 당연할 뿐, 여기서 제 모자란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랑이여, 나 저절로 일렁이네 오월 숲에선 뻐꾸기 한나절 호곡도 가슴 깊숙이 녹아내릴 뿐 세상은 너무 억울하지도 않네 그렇다네, 세월이 잠깐 비껴난 숲에서 일렁이는 것들이 진저리치다 산 꿩의 썽썽한 목청을 틔울 때 사랑이여, 난 이 지상의 외로움 조팝꽃 그 쌀알수만큼은 녹이겠네 아니아니 또르르륵 또르르륵 굴리는 방울새는 은방울꽃을 흔들고 핑핑핑 크루루 하고 쏘는 흰눈씹황금새는 산괴불주머니를 터뜨린다면 다만 이것들의 신기한 재주에 놀라 흐린 눈 동그랗게만 떠보아도 마음의 환한 자리 하나 어찌 못 얻으랴 그 누구라서 농축된 외로움 없으랴만 저 잎새 하나하나로 좀 녹여본다면 계곡의 물소리로 흘러본다면 어느 시인은 저 찌르레기 소리를 쌀 씻어 안치는 소리라 했지 오늘은 이팝나무 꽃에다 쏟아 붓는군 또 금 주고 사고 싶은 저 금붓꽃의 이파리엔 정녕 어찌 하지 못할 뿐 이 오월 숲의 초록 절정, 이 생생한 일렁임과 아득히 젖어오는 그 무슨 은총과 목숨의 벅찬 숨결 한 자락이 쟁명한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순간을 무척은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없을 때 사랑이여, 나는 내 생의 죄업을 저만치 밀어둘 참이겠네 그렇다네, 서러울 것 하나 없이 서러움도 가득 일렁이는 오월 숲에서 비껴난 세월을 다시 깨우치는 물소리에 서러움도 그만그만하게 여겨질 때까지 사랑이여, 나 오월 숲에서 천지를 우러러 사랑의 길을 묻네 사랑이라서 무슨 거룩한 게 아닐 테지만 저 일렁이는 것들이 하루 몽땅 저물어 머루빛 속 은하수로 일렁인다면 나 그만큼은 드높아야 하네 드높아서는 세상의 길 잃은 사랑의 길을 한껏 비추며 그대로 한번쯤 지워져도 좋을 일이라면 이 설레는 숲에서 저절로 일렁여도 그 무슨 산통 깨는 일은 아닐 테지 저 봐, 이젠 어스름 속의 잎새들이 서로의 숨결을 뽑아내 서로를 속삭여주듯 내 아픈 몸의 우선한 것으론 저 무덤 앞 제비꽃이라도 일별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