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雨좋은시 37

가을비와 창가의 커피 / 이채

가을비와 창가의 커피 / 이채 가을비 오는 날엔 습관처럼 창가에 기대어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시는 잠시 동안 빗속을 걸어가는 누군가의 연인이 되어 젖은 손을 쓸쓸히 내미는 창밖의 희미한 얼굴 언제나 빗물 같은 그리움으로 어디론가 그렇게 흘러갔었다 무지개를 꿈꾸며 무작정 달려 온 여정에도 비는 늘 쓸쓸한 것, 외로운 것 그리고 무엇인가 그리운 의미 가을비 오는 날엔 습관처럼 쓸쓸함에 기대어 커피를 마신다 외로움을 적시는 잠시 동안 빗속을 걸어가는 누군가와 작별을 하고 진실로 홀로였던 아득한 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비가 내리고 가장 먼 그리움으로 나는 또 빗속을 걸어가네

비雨좋은시 2019.09.09

늙은 비의 노래 / 마종기

늙은 비의 노래 / 마종기 나이 들면 사는 게 쉬워지는 줄 알았는데 찬비 내리는 낮은 하늘이 나를 적시고 한기에 떠는 나뭇잎 되어 나를 흔드네 여기가 희미한 지평의 어디쯤일까 사선으로 내리는 비 사방의 시야를 막고 헐벗고 젖은 속세에 말 두 마리 서서 열리지 않는 입 맞춘 채 함께 잠들려 하네 눈치 빠른 새들은 몇 시쯤 기절에서 깨어나 시간이 지나버린 곳으로 날아갈 것인가 내일도 모레도 없고 늙은 비의 어깨만 보이네 세월이 화살 되어 지날 때 물었어야지 빗속에 혼자 남은 내 절망이 힘들어할 때 두꺼운 밤은 내 풋잠을 진정시켜 주었고 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편안해졌다 나중에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안개가 된 늙은 비가 어깨 두드려주었지만 아, 오늘 다시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는 빗속에 섞여 ..

비雨좋은시 2019.09.06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 박제영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 박제영 그리움이란 마음 한 켠이 새고 있다는 것이니 빗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마음 한 둑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니 비가 내린다, 그대 부디, 조심하기를 심하게 젖으면, 젖어들면, 허물어지는 법이니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마침내 무너진 당신, 견인되고 있는 당신 한 때는 ‘나’이기도 했던 당신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비가 내리는 오후 세 시 나를 견인하고 있는 당신 이 시는 2008년에 발간한 시인 박제영의 시집 『뜻밖에』에 실려 있습니다 박제영시인 1966년 강원 춘천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1992년 등단 시집 『소통을 위한, 나와 당신의』 『푸르른 소멸-플라스틱 플라워』 『뜻밖에』『 식구』『 그런 저녁』 산문집 『소통의 월요 시 편지』『대화』 번역서 『 어떤 왕자』 1990..

비雨좋은시 2019.09.02

여우비 / 송기흥

여우비 / 송기흥 여우비 온다, 여우 같은 그대 생각 환하게 밝히며 빗방울 떨어진다 마당 귀퉁이 얕은 물웅덩이에 빗방울의 작은 발바닥들이 둥글둥글 파문을 그린다 사랑도 가슴 가장자리까지 쉼 없는 생각을 밀며 번져나가는 빗방울 같은 것, 잠시 잠깐의 환한 통증이 무심결에 찾아오는 이런 생애의 한 순간이여, 누가 이토록 오래 내려놓은 스위치를 올렸나, 확 불이 붙는 점등의 순간, 모든 게 들통나버린 오후의 알몸을 더듬는 손길이 보였다 멧비둘기도 매미들도 차마 소리를 딱, 그친 염천 한 때 여우비 환하게 내려 내 그리움의 심연도 막 번져나간다 송기흥 시인 1960년 전남 고흥 출생 2001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 『흰뺨검둥오리』

비雨좋은시 2019.08.14

굵은 비 내리고 / 장만호

굵은 비 내리고 / 장만호 굵은 비 내리고 나는 먼 곳을 생각하다가 내리는 비를 마음으로만 맞다가 칼국수 생각이 났지요 아시죠, 당신, 내 어설픈 솜씨를 감자와 호박은 너무 익어 무르고 칼국수는 덜 익어 단단하고 그래서 나는 더욱 오래 끓여야 했습니다 기억하나요, 당신 당신을 향해 마음 끓이던 날 우리가 서로 너무 익었거나 덜 익었던 그때 당신의 안에서 퍼져가던 내 마음 칼국수처럼 굵은 비 내리고 나는 양푼 같은 방 안에서 조용히 퍼져갑니다 장만호 시인 1970년 전북 무주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과와 同 대학원 졸업 200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등단 시집『무서운 속도』 저서『한국시와 시인의 선택』 2008년 김달진문학상 젊은시인상 수상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재직중

비雨좋은시 2019.08.06

중년의 외로움으로 내리는 비 / 이채

중년의 외로움으로 내리는 비 / 이채 새털 같은 시간들이 한 움큼씩 머리카락처럼 빠져나가네 숭숭 구멍이 뚫린 가슴으로 삼베 같은 비가 내리고 허옇게 보이는 맨살을 타고 콧잔등이 시큰하도록 불어오는 허무네 지나고 보니 솔바람 같은 세월이었다 싸리비로 빗물을 쓸던 아버지가 생각나고 우산을 들고 기다리던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흘러가버린 시간의 뒷모습이 젖어가고 외로움에 차가운 빗물이 서글픔에 뜨거운 눈물이 온기가 다른 두 액체가 하나로 흐르는 속내를 누가 알 것이냐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비오는 거리에서 남겨진 것이라고는 흠뻑 젖은 홀로였을 뿐 고독하더라도 진실이 좋았기에 하늘은 흐려도 맑은 눈을 가지고 싶었고 바람은 추워도 따뜻한 손을 지니고 싶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막다른 골목길에서도 거짓은 싫었지. 그저 초..

비雨좋은시 2019.07.27

밤비 / 마종기

밤비 / 마종기 참 멀리도 나는 왔구나 산도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강물도 흙이 되어 흐르지 않는다 구름은 사방에 풀어지고 가까운 저녁도 말라 어두워졌다 그대가 어디서고 걷고 있으리라는 희망만 내 감은 눈에 아득히 남을 뿐 폐허의 노래만 서성거리는 이 도시 이제 나는 안다 삶의 사이사이에 오래된 다리들 위태롭게 여린 목숨조차 편안해 보이고 그대 누운 모습의 온기만 내 안에 살아 있다 하늘은 올라가기만 해서 멀어지고 여백도 지워진 이 땅 위의 밤에 차고 외로운 잠꼬대인가 창밖에서 떠는 작은 새소리, 빗소리

비雨좋은시 2019.07.19

비가 오면 / 이상희

비가 오면 / 이상희 비가 오면 온몸을 흔드는 나무가 있고 아, 아, 소리치는 나무가 있고 이파리마다 빗방울을 퉁기는 나무가 있고 다른 나무가 퉁긴 빗방울에 비로소 젖는 나무가 있고 비가 오면 매처럼 맞는 나무가 있고 죄를 씻는 나무가 있고 그저 우산으로 가리고 마는 사람이 있고 이상희 시인 1960년 부산 부산여대(현 신라대) 졸업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로 등단 그림책 작가, 그림책 번역가 사회적협동조합 그림책도서 이사장 세계아동도서협의회(KBBY) 운영위원 원주 토지문학공원 내 운영 시집 외 다수 , 등 영미그림책 100여 권을 우리말로 옮겼고 , 등 다수의 그림책을 지었다

비雨좋은시 2019.07.18

당신은 지나가는 비 / 아그네스

당신은 지나가는 비 / 아그네스 내 마음에 살포시 찾아든 그대는 내게 지나가는 비처럼 내 가슴에 젖어들어 나를 슬프게하네 그대는 내 가슴에 젖어들어 나를 설레이게하여 수줍음에 가슴만 타들어 가게하네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대 생각으로 서성이는 내 시야에 떨어지는 빗소리만 구슬프게 들리네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 내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은 지나가는 비처럼 내마음을 적시어 가네

비雨좋은시 2019.06.28

비오는 날 / 마종기

비오는 날 / 마종기 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 당신을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나면 환한 불을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길을 찾고 싶다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은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

비雨좋은시 2019.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