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雨좋은시 37

침묵의 비 / 장정혜

침묵의 비 / 장정혜 조용히 비가 내린다 발자욱 소리도 없이 소리는 허공에다 채우고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는 날 빛 바람 소리 모든 것 내 안에 감추고 침묵한다 침묵하고 있다고 당신을 잊어버린 건 아닌데 푸른 안개가 허리를 휘감고 하늘빛 가슴으로 스며드는 시간이면 나는 깊은 심장의 고동으로 당신 그림자를 맴돌고 있다 오래도록 당신과 나는 함께 꿈을 꾸어왔기 때문이겠지 그 그리움 놓치지 않으려고 달빛 고운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싶은데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고 있는 것은 내 안에 그리움이 아직 지치지 않기 때문이겠지

비雨좋은시 2018.08.16

비 오는 날의 일기 / 이정하

비 오는 날의 일기 / 이정하 그대가 날 부르지 않았나요 하루종일 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았습니다 이런 날 내 마음은 어느 후미진 찻집의 의자를 닮지요 비로소 그대를 떠나 나를 사랑할 수 있지요 안녕, 그대여 난 지금 그대에게 이별을 고하려는게 아닙니다 모든 것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지요 당신을 만난 그날 비가 내렸고 당신과 헤어진 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으니 안녕, 그대여 비만 오면, 소나기라도 뿌리는 이런 밤이면 그 축축한 냄새로 내 기억은 한없이 흐려집니다 그럴수록 난 당신이 그립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안녕, 그대여 그대가 날 부르지 않았나요 비가 오면 왠지 그대가 꼭 나를 불러줄 것 같아요

비雨좋은시 2018.08.09

음악처럼, 비처럼 / 안현미

음악처럼, 비처럼 / 안현미 새춘천교회 가는 길 전생처럼 패랭이꽃 피어 있을 때 흩뿌리는 몇 개의 빗방울 당신을 향한 찬송가 같았지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 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한 찬송가 불렀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지 예배당 앞에 나란히 앉아 기도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담뱃불을 붙여 줬던가 그 교회 길 건너편엔 마당에 잡초 무성한 텅 빈 2층 양옥집도 있었던가 그 마당에 우리의 슬픔처럼 무성한 잡초를 모두 뽑고 당신의 눈썹처럼 가지런하게 싸리비질하고 꼭 한 달만 살아보고 싶었던가 햇빛 좋은 날 햅쌀로 풀을 쑤어 문풍지도 바르고 싶었던가 그렇게 꼭 한 달만 살아보자고 끄드겨 보고 싶었던가 그..

비雨좋은시 2018.07.03

소나기 / 곽재구

소나기 / 곽재구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를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앉아 다리쉼을 하다가 그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격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람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이를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비雨좋은시 2008.08.17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 조병화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 조병화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과거가 비가 오는 거리를 혼자 걸으면서 무언가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란다 낙엽이 떨어져 뒹구는 거리에 한 줄의 시를 띄우지 못하는 사람은 애인이 없는 사람이란다 함박눈 내리는 밤에 혼자 앉아 있으면서도 꼭 닫힌 창문으로 눈이 가지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덫을 모르는 가엾은 사람이란다

비雨좋은시 2008.08.09

거리에 비 내리듯 / Paul-Marie Verlaine

거리에 비 내리듯 / 폴 베를렌느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마음엔 눈물이 내리네 가슴 속 깊이 스며드는 이 슬픔은 무엇일까 땅 위에 지붕 위에 비 오는 소리의 처량함이여 속절없이 외로운 마음 울리는 아, 빗소리, 비의 노래 서럽고 울적한 이 마음엔 뜻모를 눈물만 내리네 원망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 슬픔을 알길이 없네 사랑도 없고 원한도 없으련만 내 마음 왜 이다지 아픈지 그 이유조차 모르는 일이 가장 괴로운 아픔인 것을

비雨좋은시 2008.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