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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10,11,12 / 이해인

가을 편지 10, 11, 12 / 이해인 10. 하찮은 일에도 왠지 가슴이 뛰는 가을, 나는 당신 앞에 늘 소심증 환자입니다 내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나서도 죄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고, 내 모든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도 사랑은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 있는 것 이것이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초조합니다 11. 뜰에는 한 잎 두 잎 낙엽이 쌓이고 내 마음엔 한 잎 두 잎 詩가 쌓입니다 가을이 내민 단풍빛의 편지지에 타서 익은 말들을 적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읽으시는 고요한 저녁, 내 영혼의 촉수 높여 빈방을 밝힙니다 12. 나무가 미련 없이 잎을 버리듯 더 자유스럽게, 더 홀가분하게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하나의 높은 산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낮은 언덕도 넘어야 하고, 하나의 큰 바다에 이르..

詩音律庭園 2022.09.27

가을 편지 7, 8, 9 / 이해인

가을 편지 7, 8, 9 / 이해인 7.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주웠습니다 크나큰 축복의 가을을 조그만 크기로 접어 당신께 보내고 싶습니다 당신 앞엔 늘 작은 모습으로 머무는 나를 그래도 어여삐 여기시는 당신 8. 빛바랜 시집, 책갈피에 숨어 있던 20년 전의 단풍잎에도 내가 살아 온 가을이 빛나고 있습니다 친구의 글씨가 추억으로 찍혀있는 한 장의 단풍잎에서 붉은 피 흐르는 당신의 손을 봅니다 파열된 심장처럼 아프디아픈 그 사랑을 내가 읽습니다 9.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붙는 단풍숲, 누구도 끌 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내 마음은 열리는 가을 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늘입니다

詩音律庭園 2022.09.26

가을 편지 4, 5, 6 / 이해인

가을 편지 4, 5, 6 / 이해인 4. 가을의 그윽한 이마 위에 입맞춤하는 햇살, 햇살을 받아 익은 연한 햇과일처럼 당신의 나무에서 내가 열리는 날을 잠시 헤아려 보는 가을 아침입니다 가을처럼 서늘한 당신의 모습이 가을 산천에 어립니다 나도 당신을 닮아 서늘한 눈빛으로 살고 싶습니다 5. 싱싱한 마음으로 사과를 사러 갔었습니다 사과 씨만한 일상의 기쁨들이 가슴 속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심히 지나치는 나의 이웃들과도 정다운 인사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6. 기쁠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감탄사를 아껴 둡니다 슬플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눈물을 아껴 둡니다 이 가을엔 나의 마음 길들이며 모든 걸 참아 냅니다 나에 도취하여 당신을 잃는 일이 없기 위하여

詩音律庭園 2022.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