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레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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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해 시인
1941년 부산
해동고등학교, 동국대 국문과
1963년 ‘자유문학’ 신인문학상에 시 ‘저녁’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내란' 당선 등단
‘정음사’ ‘심상’ 등의 편집에 참여하며 전문 출판인으로 활동했고
‘현대시’ 동인으로도 참여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이사,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발기위원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현재는 도서출판 문학세계사의 대표이사 겸 주간을 맡고 있다
김종해 시인은 먼저 세상을 떠난 친동생 김종철 시인과 함께
문단의 대표적 ‘형제 시인’으로 유명하다
김종해 시인의 작품은 서민들의 생활을 형상화하면서도
강한 현실인식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집
<늦저녁의 버스킹>
<인간의 악기> <신의 열쇠> <왜 아니 오시나요> <천노(賤奴), 일어서다>(장편서사시)
<항해일지> <바람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별똥별> <풀>
<봄꿈을 꾸며> <눈송이는 나의 각을 지운다’> <모두 허공이야>
시선집
<누구에게나 봄날은 온다> <무인도를 위하여><우리들의 우산>
<그대 앞에 봄이 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김종해·김종철 형제 시집)
수상, 수훈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한국시인협회상, 공초문학상
펜(PEN)문학상, 문화부장관 유공출판인 표창 수상
보관문화훈장 수훈
2016년 열한 번째 시집 <모두 허공이야> 펴냅니다
이제 비로소 보이는구나
봄날 하루 허공 속의 문자
하르르 하르르 떨어지는 벚꽃을 보면
이생의 슬픈 일마저 내 가슴에서 떠나는구나
귀가 먹먹하도록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리는 벚꽃을 보면
세상만사 줄을 놓고
나도 꽃잎 따라 낙하하고 싶구나
바람을 타고
허공 중에 흩날리는
꽃잎 한 장 한 장마다
무슨 절규, 무슨 묵언 같기도 한
서로서로 뭐라고 소리치는 마지막 안부
봄날 허공 중에 떠 있는
내 귀에도 들리는구나
("모두 허공이야")
이 시집에는 생의 황혼에 느끼는 소회와 죽은 아우(김종철 시인)를 그리는 심정
이역에서 길어올린 시어와 어린시절 고향을 떠올리는 시편들로 채워졌다
몇날 며칠 내내
비 오다 바람 불다
혼자서 바라보는 허공
빗방울 묻은 유리창에
일그러진 세상이 흘러내린다
그 안에 문득 쭈그러진 내 얼굴이 보인다
죽은 아우와 이탄 시인이
함께 찾아온 지난 밤은
아쉬운 봄날
그 밤에 마신 술의 취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망자와 함께
지우고 또 지우며 바라보았던
유리창 바깥의 세상
거기, 문득 나 혼자 서 있다
(‘유리창에 번지다’)
이 시집 2부는 ‘잘 가라, 아우’로 꾸며져 있다
이별을 준비하는 호스피스 병동은
차라리 산 자들의 고문 장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마저 나는 믿을 수 없구나
가슴속에 담아 둔 말 쏟지 못하고
아우여, 나는 아우의 여윈 손만 잡는다
눈을 감으면, 아우의 전 생애가
한꺼번에 온몸에 감전되어 흘러내린다
너를 위해 세상의 어떤 말이
위로가 되랴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아우여, 나는 너의 여윈 손만 잡는다
(‘잘 가라, 아우’)
시인은 비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되뇐다
비는 하늘에서 내리고
나는 창 안에서 홀로 젖는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지
삶은 혼자서 걷는다는 것
우리는 서로 스쳐가고 있을 뿐
(‘그대를 보내며’)
등단 57년차인 2019년에는
죽음과 이별에 대한 소회를 바탕으로 평범한 일상을 시의 소재로 일구어낸
열두 번째 시집 <늦저녁의 버스킹>을 출간했다
멀리서 보면 고요하고 아름답구나
가까이서 보면 허방뿐
내가 살아왔던 행성
내가 떠나고 없는 세상
나는 한평생
사람으로서 무엇에 매달려 있었던가
(‘사람으로서 살았던 때가 있었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이요 고요하고 아름다운 행성이다
그림 같은 이 행성도 가까이서 보면 도처에 구멍 뚫린 허방이다
이 별에서 사람으로 머물다 떠나면서 무엇을 남겨놓은 것인지
노시인은 겸허하게 돌아본다
멀리서 보면 외로운 점처럼 보일지언정
그 별의 외로움은 당신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시인은 목소리를 높인다
그 빈 허공의 시간 속에서
잠시 안식하라
찰나 속에서 서로 사랑하라
외로운 별은 너의 것이 아니다
반짝 빛나는 그 허공의 시간을
네 것인 사랑으로 채우다 가라
(‘외로운 별은 너의 것이 아니다’)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꺼낼 수 있는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당신의 사랑으로
찰나를 스쳐가는 허공의 시간을 채우다 가라고 시인은 곡진하게 당부한다
그것은 가끔 꿈속에서 별이 되어 나타나는
이곳 푸른 별의 시공에 잠시 살았던 사람들의 전언이기도 하다
나뭇잎 떨어지는 저녁이 와서
내 몸속에 악기樂器가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간 소리 내지 않았던 몇 개의 악기
현악기의 줄을 고르는 동안
길은 더 저물고 등불은 깊어진다
(…)
나뭇잎 떨어지고 해지는 저녁
내 몸속의 악기를 모두 꺼내어 연주하리라
어둠 속의 비애여
아픔과 절망의 한 시절이여
(…)
저녁이 와서 길은 빨리 저물어 가는데
그동안 이생에서 뛰놀았던 생의 환희
내 마음속에 내린 낙엽 한 장도
오늘밤 악기 위에 얹어서 노래하리라
(‘늦저녁의 버스킹’)
시인이 거리에서 늦저녁에 부르는 노래들에는
아내에 대한 애틋한 사랑도 담겨 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지만
아프지 않고 서로에게 안식이 되어주는 삶
아내가 있어서 나는 너무 고맙다
압력밥솥 위에서
다 된 밥을 알리는 노즐도 뛰고 있다
(‘아내를 위해 밥상을 차리는’)
*** 편집 : 윤슬 성두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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