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종기 3

늙은 비의 노래 / 마종기

늙은 비의 노래 / 마종기 나이 들면 사는 게 쉬워지는 줄 알았는데 찬비 내리는 낮은 하늘이 나를 적시고 한기에 떠는 나뭇잎 되어 나를 흔드네 여기가 희미한 지평의 어디쯤일까 사선으로 내리는 비 사방의 시야를 막고 헐벗고 젖은 속세에 말 두 마리 서서 열리지 않는 입 맞춘 채 함께 잠들려 하네 눈치 빠른 새들은 몇 시쯤 기절에서 깨어나 시간이 지나버린 곳으로 날아갈 것인가 내일도 모레도 없고 늙은 비의 어깨만 보이네 세월이 화살 되어 지날 때 물었어야지 빗속에 혼자 남은 내 절망이 힘들어할 때 두꺼운 밤은 내 풋잠을 진정시켜 주었고 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편안해졌다 나중에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안개가 된 늙은 비가 어깨 두드려주었지만 아, 오늘 다시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는 빗속에 섞여 ..

비雨좋은시 2019.09.06

밤비 / 마종기

밤비 / 마종기 참 멀리도 나는 왔구나 산도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강물도 흙이 되어 흐르지 않는다 구름은 사방에 풀어지고 가까운 저녁도 말라 어두워졌다 그대가 어디서고 걷고 있으리라는 희망만 내 감은 눈에 아득히 남을 뿐 폐허의 노래만 서성거리는 이 도시 이제 나는 안다 삶의 사이사이에 오래된 다리들 위태롭게 여린 목숨조차 편안해 보이고 그대 누운 모습의 온기만 내 안에 살아 있다 하늘은 올라가기만 해서 멀어지고 여백도 지워진 이 땅 위의 밤에 차고 외로운 잠꼬대인가 창밖에서 떠는 작은 새소리, 빗소리

비雨좋은시 2019.07.19

비오는 날 / 마종기

비오는 날 / 마종기 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 당신을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나면 환한 불을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길을 찾고 싶다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은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

비雨좋은시 2019.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