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詩

첫사랑 / 심재휘

음악듣는남자 2020. 4. 2. 21:30


 
 첫사랑 / 심재휘
장충동에 비가 온다
꽃잎들이 서둘러 지던 그 날
그녀와 함께 뛰어든 태극당 문 앞에서
비를 그으며 담배를 빼물었지만
예감처럼 자꾸만 성냥은 엇나가기만 하고
샴푸향기 잊혀지듯 그렇게 세월은 갔다
여름은 대체로 견딜 만하였는데
여름 위에 여름 또 여름 새로운 듯
새롭지 않게 여름 오면
급히 비를 피해 내 한 몸 겨우 가릴 때마다
비에 젖은 성냥갑만 늘었다 그래도
훨씬 많은 것은 비가 오지 않은 날들이었고
나뭇가지들은 가늘어지는 운명을 향해 걸어갔다
가늘어지기는 여름날 저녁의 비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후로 많은 저녁들이 나를 지나갔지만
발 아래 쌓인 세월은 귀갓길의 느린 걸음에도
낡은 간판처럼 가끔 벗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른 꽃잎에게 묻는 안부처럼
들쳐보는 그 여름 저녁에는 여전히 
버스만 무심하게 달리고 있었다
이별도 그대로였다
비가 오는 장충동 네거리 내 스물 두 살이
여태껏 그 자리에 서 있던 거였다


 

심재휘 시인

1963년 강릉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국문학 박사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그늘』 『중국인 맹인 안마사』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시론집 『한국현대시와 시간』 수상 김종철 문학상(2019년 제1회) 현대시 동인상, 발견문학상 대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


 
심재휘 시인의 詩는  얼마 전인 3월 25일 <첫사랑♡詩>에 올린
<다시 첫사랑에 관하여>에 이어 두 번째로 올립니다
코로나 때문에 요즘 외출을 삼가하니 여유로운 시간이 많아져
이 詩에 <태극당> 얘기가 나왔으니까 몇 가지 얘기를 곁들여 보고자 합니다
* * * * * *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은 전북 군산에 있는 <이성당>인데
몇 년 전 집사람이 <이성당> 빵 얘기를 듣고 현지에 가서(택배도 되지만)
먹고 싶어해서 2박3일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군산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오후 4시 조금 늦어 <이성당>앞에 도착했는데 어림잡아 봐도
이미 50m이상이나 <이성당> 앞 인도에 장사진의 줄을 서 있더라구요
(저희가 간 날은 평일인데, 전국 각지에서 온다고 하니 주말, 공휴일에는 더하겠죠?)
바로 앞에 일행인 20대로 보이는 젊은 분들 대여섯 분은 관광차 온 게 아니라 
오직 <이성당> 쌀가루 단팥빵과 야채빵을 사기 위해서 대전에서 왔다는데 
사자마자 가족과 나눠 먹기 위해 대전으로 곧바로 간답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들 떼로 몰려온 이유는 1인당 구매 제한 수량 때문이였습니다)

집사람과 제가 줄 선 곳이 왼쪽 편에 보이는 공중전화박스 쯤입니다
쌀가루로 반죽하여 만든 단팥빵과 야채빵을 사서 은파호수공원으로 가 호수 둘레의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은파호수는 조선 중종 때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호수라고 합니다) 겨우 자리가 난 벤치에 앉아 화려한 야간 음악분수쇼와 물빛다리에 열광하며 먹었습니다 제가 단팥빵을 무지 좋아하는데 쌀가루로 만든 단팥빵은 처음이었습니다 쌀가루는 반죽할 때 밀가루 반죽 같은 찰기(점성)가 없어서 표피로 쓰는 게 까다로울텐데 그러면서도 쌀가루 표피를 만두피처럼 아주 얇게 해냈다는 게 <이성당>만이 갖고 있는 특화된 기술이며 담백한 쌀가루 표피와 푸짐하고 촉촉한 <단팥소>가 어찌나 맛있던지.... 먹고 싶어 가자고 한 사람은 집사람인데 먹긴 제가 더 많이 먹었습니다 그날 들은 얘기로는 1인당 구매수량을 평소엔 대개 10개까지로 제한하는데 그날따라 만든 수량이 평상시보다 부족하여 7개던가 몇 개로 한정하여 배 터지도록 먹으려던 욕심을 채우질 못해 무척 아쉬웠지만 어차피 한 번에 다 못 먹어 다음 날까지 맛나게 먹었습니다 다른 빵은 수량 제한이 없으니 자유롭게 담으면 되는데 단팥빵과 야채빵은 수량 제한이 있어 한참 줄 선거에 비해 구매절차가 싱거웠습니다 다른 날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그날은 단팥빵 수량 부족으로 이미 똑같은 수량으로 담아놓은 노란 종이봉투를 건네 받기만 하였습니다 <이성당>도 과거에는 다른 데와 매한가지로 밀가루 반죽을 사용하였으나 몇 년에 걸친 실험과 시행착오 끝에 2006년 부터 쌀가루 반죽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합디다

정작 서울은 상당기간 지내기도 했고 갈 기회가 많았는데도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라는 태극당은 기회가 닿질 않아 아직 한 번도 들어가보질 않았습니다 태극당은 장충동에 있는데 장충동 하면 장충동 족발과 배호의 노래 <장충단 공원>이 떠오르지요 이 공원에는 유관순 열사와 이준 열사의 동상도 있고 공원 입구에는 청계천에서 이전해 온 수표교도 있습니다 태극당과 <장충단 공원>은 바로 인접해 있고 동국대학교 캠퍼스도 바로 인근에 있습니다 태극당은 1946년 창업 되었다고 합니다 2013년 작고한 창업주 신창근(당시 23세) 회장께서 일본인 제과점에서 일했는데 8.15 해방이 되자 일본인 주인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두고 간 장비를 인수 받아 명동에 제과점을 열면서 <태극당>이라는 간판을 내걸었고 1974년 현재의 장충동 자리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태극당은 전통을 고수하고 있어서 70년대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인테리어 소품이 많답니다

태극당은 1969년도에 약 635만원의 세금을 납부했는데 이 금액은 당시 제과업계에서는 전국 납세 1위였을 정도로 크게 번창하였습니다 "번 만큼 세금을 내야 한다"는 故 신창근 창업주의 신념에 따라 영수증이라는 개념도 없던 그 시대에 일본에서 금전등록기를 들여와 영수증을 반드시 발행하여 챙겨주며 성실 납세를 했던 그 흔적이 매장 안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60년대 , 70년에는 태극당은 요즘으로 치면 스타벅스처럼 젊은 남녀들이 많이 오는 Hot Place 였다고 합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촬영 장소로 쓰이기도 한 태극당은 연세를 잡수신 분들에게는 과거의 향수를 되살릴 수 있는 회상의 장소로 젊은 층들에겐 60, 70년대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문화의 공간, 소통의 공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빵 제조과정 벽화
빵은 60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책에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에 빵은 성서가 쓰이기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오늘날과 비슷한 발효한 효모를 넣은 희고 부드러운 빵은 서기전 2000년경에 이집트인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기원전 800년경 로마로 전파된 후 제빵 기술이 크게 발전되었고 로마가 멸망 후 유럽 각지로 퍼졌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빵이 들어온 건 1834년인데 프랑스인 신부 2명이 빵을 가져 왔다고 합니다 1856년에 프랑스 신부 베르뇌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빵을 굽는데 숯불을 피운 뒤 시루를 엎고 그 위에 빵 반죽을 올린 다음 오이자베기(주둥이가 넓은 질그릇)로 덮어 화덕을 만들어 구웠답니다 당시 만들어진 빵의 모양이 쇠불알(도톰한 바게뜨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조선인들은 그 빵을 보고 <우랑떡>이라고 불렀다고 하니까 우리나라 최초의 빵 이름은 우리말로는 <쇠불알떡>입니다
손탁 호텔
1884년 한로통상조약체결 이후에 러시아인 웨베르 공사와 함께 러시아에서 파견되어 대한제국의 통역사 역할을 했던 독일인 여성 존탁(Antoniette Sontag, 우리식 이름은 손탁, 孫澤)이 공관 앞에 정동구락부를 개설하고 우리 나라 최초의 판매용 빵을 만들었는데 중국식 이름으로 면포(麵包)라는 빵과 설고(雪餻)라고 부른 카스텔라 였다고 합니다 손탁은 1896년에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 머무르게 되자 고종에게 커피를 진상하였고 이 일로 인해 존탁은 고종의 신임을 얻었고 이때 커피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으며, 훗날 손탁은 우리나라 최초의 호탤인 손탁 호텔을 덕수궁 근처에 지어 이 호텔의 지배인이 됩니다 포르투갈과 교역을 하면서 빵을 수입하게 된 일본인들은 빵의 포르투갈어 '팡데로(Pão-de-ló)'를 <팡>이라 불렀는데 일본의 강점기를 거치면서 <빵>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정착 됩니다 6.25 전쟁 이후 밀의 수입이 활발해지면서 다양한 제과점들이 생겨났고 1960년대에 빵을 대규모로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으로 빵의 대중화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 글쓴이 : 윤슬 성두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