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이야기 / 하춘화
(박춘석 작사 작곡, 1972년)
수많은 잔별들이 소근대는 밤하늘
구름에 달이 가듯 철새가 날으면
남몰래 그려보는 가슴속에 새긴
마음속에 새긴 첫사랑의 그 얼굴
수줍은 그 사랑이 가슴속 깊이
수놓을 줄 나는 몰랐네
새빨간 장미꽃이 곱게 피는 가슴에
꽃잎에 여울지듯 나비가 날으면
남몰래 그려보는 가슴속에 새긴
마음속에 새긴 첫사랑의 그 모습
수줍은 그 사랑이 가슴속 깊이
수놓을 줄 나는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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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전남 영암군
어릴 적부터 노래 잘 하기로 명성이 자자할 정도로
하춘화의 노래실력을 일찍이 알고 있던 아버지가 하춘화를 가요계에 입문시켰다
지금이야 아이돌 가수라면 대중들의 많은 사랑과 찬사를 받는 시대이지만
60년대, 70년대에는 대중가요와 대중가수는 딴따라나 광대로 폄하하던 시기였기에
하춘화의 재능을 조기에 발견하고 헌신적으로 뒷바리지한 아버지의 안목과 용기가 대단하다
하춘화는 1961년 만 6세에
8개월 동안 서울 동아예술학원 가요과를 수료한 이후
데뷔곡 《효녀 심청 되오리다》가 수록된 레코드를 취입하였다
당시 불과 만 6세의 나이로 대한민국에서 최연소로 데뷔한 것이였고
당시 기준 세계 최연소 음반 출반 가수로 추정된다
하춘화의 나이가 너무 어렸으므로 아버지가 줄곧 따라다니면서
매니저 역할을 하며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도록 도왔고
데뷔한지 5년 만인 1966년에 《아빠는 마도로스》가 처음으로 히트하였다
17세가 되던 1971년에 정규 1집 음반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데뷔해 정식 가수가 되었다
1집 음반의 타이틀곡이였던 정통 트로트 《물새 한 마리》가 히트하여
인기몰이를 하게 되고 성인 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며 가요계를 이끌게 되었다
1972년에 가수 겸 작곡가였던 고봉산과 《잘했군 잘했어》를 듀엣으로 불러
TBC 동양방송에서 여자가수상을 4년 연속으로 수상하며
불과 18세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 톱 가수로 성장했다
그 해 자신의 고향을 소재로 만들어 아리랑의 맥을 이어나간
신민요 《영암 아리랑》도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당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배 가수였던 이미자, 패티 김, 김상희, 문주란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정상급 여성 가수로 발돋움 하였다
1970년 대에 접어들며 정통트로트 《알고 계세요》, 팝 스타일의 《숙녀 초년생》
빠른 템포의 리듬의 곡 《난생 처음》, 《우리 사이》등 여러 곡들을 히트시켜
MBC 10대 가수상을 수상하고 1970년 대의 인기가수로 등극한다
1974년부터 자신만의 리사이틀 공연을 시작하였으며 그 해에 영화 《숙녀 초년생》에서
남진과 함께 주연으로 열연하여 영화계에도 진출하기도 하였다
1977년 11월11일 밤 전북 이리(지금의 익산)역 화약수송열차에서
다이나마이트 22톤과 폭약 등이 터져 사망 59명, 실종 2명, 중상184명,
경상 1,156명의 인명피해와 많은 가옥파손을 일으키는 대형사고가 발생하였다
한국화약 직원의 호송원이 촛불을 켜놓고 잠을 자다가
촛불이 넘어지면서 화약상자에 옮겨 붙으며 일어난 대형사고였다
폭발사고 때 이리역 인근의 산남극장에서 하춘화가 쇼를 펼치고 있었다
유명가수들의 쇼가 유행이던 시절로 하춘화는 자신의 이름의 쇼로 전국 투어를 펼쳤다
지금은 고인이 된 코미디언 이주일이 보조MC로 하춘화쇼에 기용됐다
당시 하춘화는 이미자의 대를 이을 가수로 소문이 나 23살로 항창 줏가를 올리고 있었고
이주일은 무명의 사회자로 보조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날 하춘화쇼 메인 MC가 사정이 생겨 이주일이 땜빵MC로 무대에 올랐다
하춘화는 막간을 이용해 분장실에서 쉬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폭발사고가 나
폭발의 여진으로 극장이 붕괴되는 바람에 하춘화는 잔해에 깔렸다
이때 이주일이 쓰러져있는 하춘화를 뱔견하여 들쳐업고 병원으로 달려가
응급처치를 취한 결과 골절상은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그후 하춘화는 그때의 악몽을 딛고 '이리 이재민돕기 자선쇼'를 개최해
수익금 100만원을 기탁해 매스컴에서 미담의 주인공으로 소개됐다
하춘화는 생명의 은인인 이주일을 자신의 쇼에 붙박이 MC로 기용하는데
이주일은 특유의 재치와 익살로 MC계를 평정하기에 이른다
1979년 경남대학교(가정학과)에서의 학업과 결혼 준비로 인하여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 후 학업에 열중하던 하춘화는 은퇴 선언 2년 만인 1981년에 가수로 복귀하였지만
가수로 활동하면서도 학업에 대한 열정을 놓지는 않았다
1994년에 고려대 자연자원대학원 최고위정책과정을 수료하고 나서
1998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 가정관리학과를 학사 학위 취득하고
2000년에는 동국대 대학원에서 《한국가요의 원류와 변천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공연예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6년 후 2006년에는 성균관대학교에서
현대 대중가요 역사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예술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박사 학위를 소지한 최초의 대한민국 가수가 되었다
1991년에는 1,260회라는 가요사상 가장 많은 공연기록을 가져
무대공연 신기원을 기록해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으며
2019년 현재 통산 8,500여 회의 개인공연횟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지만
많은 공연을 소화해내느라 발톱이 다 빠지는 등 많은 고질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2016년 현재 40여 동안 약 200억원의 기부금을 내었다고 한다
첫 콘서트 수익금 500만원 전액을 시작으로 공연이나 콘서트마다
일정 금액을 기부해왔는데, 70년대에는 100만원이면 서울에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라, 당시 어린 나이에 그 용기와 결심이 더 값지고 아름답다
2019년 데뷔 60주년 기념 앨범을 발표했다
*** 요약 편집(출처 : 위키백과와 이쪽저쪽에서) : 윤슬 성두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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