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 홍수희 눈을 감은 채 비가 내린다 말이 없는 채 비가 내린다 소리 없는 채 비가 내린다 당신의 어둠 그리고 나의 어둠 그 까마득한 혼돈의 끝자락에서 질서도 없이 대책도 없이 비인 찻잔 위에는 혼자서 덩그라니 나동그라진 그대와 그대의 서글픈 자유 고딕으로 멈춰버린 탁자 위에는 쇠빛으로 싸늘히 시들어 있는 당신과 당신의 버려진 인내 비 같은 머리카락, 머리카락 같은 비 손 뻗으면 닿을 듯한 아아, 그대의 하이얀 순결 아직, 너의 이름자조차 채 지워지지 않은 낙서 많은 유리창 저 너머에서 눈을 감은 채 비가 내린다 보이지 않는 듯 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