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비 / 송기흥 여우비 온다, 여우 같은 그대 생각 환하게 밝히며 빗방울 떨어진다 마당 귀퉁이 얕은 물웅덩이에 빗방울의 작은 발바닥들이 둥글둥글 파문을 그린다 사랑도 가슴 가장자리까지 쉼 없는 생각을 밀며 번져나가는 빗방울 같은 것, 잠시 잠깐의 환한 통증이 무심결에 찾아오는 이런 생애의 한 순간이여, 누가 이토록 오래 내려놓은 스위치를 올렸나, 확 불이 붙는 점등의 순간, 모든 게 들통나버린 오후의 알몸을 더듬는 손길이 보였다 멧비둘기도 매미들도 차마 소리를 딱, 그친 염천 한 때 여우비 환하게 내려 내 그리움의 심연도 막 번져나간다 송기흥 시인 1960년 전남 고흥 출생 2001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 『흰뺨검둥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