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노래

첫사랑 & 홍랑 / 민수현

음악듣는남자 2020. 4. 30. 23:00



 
첫사랑 / 민수현 
(문명곤/최흥호 작사, 자니유 작곡, 2019년)
그리워 그리워 그립습니다 첫사랑 그 여인이 
바라만 봐도 생각만 해도 설레이던 그 사람이 
나에겐 첫사랑 첫사랑 여인 내 어이 잊을 수 있나 
세월아 세월아 청춘아 잠시 잠시 쉬어 가자 
사나이 이 눈물을 너는 너는 모른다


그리워 그리워 그립습니다 첫사랑 그 여인이 바라만 봐도 생각만 해도 설레이던 그 사람이 나에겐 첫사랑 첫사랑 여인 내 어이 잊을 수 있나 세월아 세월아 청춘아 내 갈 길을 막지 마라 사랑의 이 눈물을 너는 너는 모른다

세월아 세월아 청춘아 잠시 잠시 쉬어 가자 사나이 이 눈물을 너는 너는 모른다 사랑의 이 눈물을 너는 너는 모른다




 

가수 민수현
1994년 대전 출생
목원대학교 작곡과 
민수현은 오랫동안 드러머와 보컬 활동을 해온 아버지의 
음악적인 DNA를 물려받은데다
작곡가 이호섭을 만난 인연이 계기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성인 가요계에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매력적인 비성의 소유자로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그의 독특한 발성은 감미로움과 애잔함을 함께 갖추고 있다
2014년 1집 싱글 앨범 <사랑의 방정식 / 내 청춘아>
2016년 2집 싱글 앨범 <홍랑>
2014년 Jtbc 히든싱어3 태진아편 최종라운드 진출
태안군 만리포가요제 홍보대사
온프렌즈전국지역아동센터 홍보대사
*** 편집 : 윤슬 성두석 *** 






 
홍랑 / 민수현 
(최흥호 작사, 이호섭 작곡, 2016년)
쓰라린 이별에 우는 맘 버들가지 꺽어 보내노라
진한 사랑 진한 정을 어이두고 떠나갔나요
백 년이 흘러가도 천 년이 가도 나는 그대 여자랍니다
객창에 피는 묏버들 보면 날인가 홍랑인가 여기소서
소리없이 울면서 지샌 밤 방울방울 띄워 보내노라
진한 사랑 진한 정을 어이두고 떠나갔나요
백 년이 흘러가도 천 년이 가도 나는 그대 여자랍니다
객창에 우는 두견새 보면 날인가 홍랑인가 여기소서
객창에 우는 두견새 보면 날인가 홍랑인가 여기소서 
* * * * * * *
민수현의 대표곡 <홍랑>은
황진이, 매창과 함께 조선 3대 명기라고 일컬어지는 여류 시인으로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 사랑하는 님을 향한 애절하고도 지고지순한 절개를 다한 
홍랑이란 기생이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인 최경창과의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와 
홍랑이 최경창에게 보낸 단 한 편의 시를 바탕으로 한 노래입니다
2000년 11월 조선 중엽의 대표적인 연시(戀詩)로 꼽히는 홍랑의 詩 원본이 공개되었는데
가람 이병기 선생은 홍랑의 詩의 내용과 표현이 보배와 같다고 평가하였는데
홍랑이 최경창에게 준 시조 한 수(후세 사람들이 "묏버들가"라 칭함)는 조선 문학사에서 
가장 애절한 연정가(戀情歌)로 알려져 있습니다
함경(남)도 홍원 출신인 홍랑은 홍원 관아의 관기였습니다
비록 신분은 비천했으나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던 홍랑의 소양과 재질은 
양반 사대부나 시인 가객들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고죽 최경창(1539년 - 1583년)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율곡 이이(1536년 -1584년)와 시를 주고 받을 만큼 재능있는 시인으로
팔문장계(이율곡, 송익필, 최립, 하응림, 최경창, 이달, 백광훈, 이산해)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불리웠고
당대의 문인인 송강 정철(1536년 - 1593년) 등과 교류하는 등 뛰어난 평가를 받았는데
율곡 이이는 그의 시를 가리켜 청신준일(淸新俊逸)하다고 칭찬했을 정도입니다
당시(唐詩)에 뛰어난 백광훈, 이달과 함께 3당시인(三唐詩人)으로도 불리우며
중국의 시문집에도 최경창의 시가 실려있다고 합니다
최경창은 그의 호 고죽(孤竹)에서 알 수 있듯이 곧고 깨끗하고 맑아 고결한 성품이였고
9 세에 한시를 지을만큼 천재적인 시인이며 관악기(피리)와 음률의 달인이였으며
손곡 이달이 '기생에게 사줄 치마값이 없다'며 시를  보내오자
詩 한 자 한 자 마다 값을 매겨 큰 돈을 보내줄 정도로 
멋지게 돈 쓸 줄 아는 멋쟁이 풍모를 갖춘 대풍류객이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발발 20년 전인 1573년(선조 6년)
함경도 북단의 변방에 위치한 경성(鏡城)의 북평사로 임명된 최경창은
경성은 국방의 요지로 중요한 군사 지역이었으므로 
가족을 동반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처자를 남겨두고 
홀로 부임하는 길에 들런 함경(남)도 홍원 관아에서 홍랑을 만나게 됩니다
최경창을 만나기 전에 이미 최경창의 시를 좋아하여 애송해왔는데
글과 무예가 뛰어나고 외모까지 준수한 최경창에게서 첫눈에 
흠모의 정과 함께 아버지를 일찍 여의여 못 보고 자라 부정(父情)까지 느낀 홍랑과
문학적 교양과 미모를 겸비한 홍랑에게 매료된 최경창은
신분과 나이(당시, 최경창은 34세였고 홍랑은 16세 또는 17-18세로 추정됨)를
뛰어넘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시와 풍류를 함께 나누는 연인이 되고
두 사람의 운명적인 사랑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결국 홍랑은 군사임무를 수행하는 막중(幕中)에서 최경창과 함께 기거하며 
부부처럼 정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난지 불과 6개월 후인 이듬해 1574년 임기가 끝난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고, 당시 국법에 따라 
관아에 속해 있는 관기는 관할 지역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없기 때문에
두 사람은 속절없이 이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최경창이 서울로 떠나는 날 홍랑은 함께 길을 나섭니다
홍랑은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기 위하여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쌍성(雙城)까지 
험준한 태산준령을 넘어야하는 천 리 길을 마다 않고 따라가 최경창을 배웅합니다
홍랑이 관기로서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함관령(咸關嶺) 고개에 이르러
홍랑도 최경창도 그저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이별을 고합니다
홀로 돌아가는 길에 날은 저물고 비는 내리는데 최경창이 절절하게 그리운 홍랑은 
길 옆에 피어있는 버들가지를 꺾어 주막에 하루를 묵던 최경창에게 인편으로
고등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아래의 한글 시조와 함께 보냅니다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난 창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요즘 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묏버들 가려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듯 여기소서
처음 만날 당시 최경창은 이미 결혼한 34세의 유부남이였지만
17,18세 경의 홍랑에게 최경창은 첫사랑이였고 지고지순한 영원한 사랑이 되었습니다
또한 관기인 홍랑과의 사랑으로 인해 관직 박탈을 감수하면서
홍랑을 나이 어린 기생이 아니라 한 여성으로 사랑하고
사랑한 그 사실(만남, 사랑, 이별의 사연들)과 주고받은 연시를 기록으로 남기고
홍랑이 써보낸 이 시조를 원본 그대로 곱게 보관하여 후세에 남긴
사대부 최경창의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진솔한 사랑은 정말 숭고합니다  
최경창이 홍랑과의 사랑을 기록으로 남기는 한편 
홍랑이 준 단 한 편의 시와 홍랑에게 건네 준 자신의 마음을 담은 가슴 아픈 이별시들을
한때 기생과 저지른 불장난으로 치부하지 않고 한낱 종잇조각으로 폐기하지 않고 
온전하게 보관하고 있던 이 시들과 최경창이 쓴 문집들이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의 전란에서도 무사하도록 지켜내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한데는 
이미 9년 전에 유명을 달리한 남자이지만(최경창은 1583년 객사함)
사랑한 한 남자의 이 모든 문집들을 자신의 목숨처럼 여기며 이고 지고 피난을 한 홍랑이 
7년간의 임란 후 해주 최씨 문중에 고스란히 전달해 준 역할이 결정적이며
해주 최씨 문중이 400년이 넘도록 잘 보관하고 공개해 준 덕분에
이로써 447년 전 그들의 순애보가 묻히지 않고 오늘날에도 우리가 목도하는 겁니다
아래의 사진에서 윗쪽은 최경창과 부인의 합장묘이고
맨앞의 묘는 해주 최씨 가문이 홍랑이 죽자 
최경창 가까이 그녀를 위해 마련해 준 묘이며 
오늘날까지 후손들이 예를 다하여 모시고 있습니다
검색을 해보시면 홍랑이 최경창의 묘 앞에 안장되기 까지의
홍랑의 사랑과 기생의 신분임에도 죽은 후 해주 최씨 사대부 가문의 족보에 이름을 올린
홍랑의 파란만장한 일생(효심이 지극했던 어린 시절의 얘기와 관기가 되기까지의 사연 포함)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죽어서 양반이 된 기생은 홍랑밖에 없다> 라는 말이 탄생하였습니다
*** 글쓴이 : 윤슬 성두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