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노래 / 패티 김
(이 유 작사, 길옥윤 작곡, 1968년)
9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
꽃잎이 피는 소리 꽃잎이 지는 소리
가로수에 나뭇잎은 무성해도
우리들의 마음엔 낙엽은 지고
쓸쓸한 거리를 지나노라면
어디선가 부르는 듯 당신 생각 뿐
9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
사랑이 오는 소리 사랑이 가는 소리
남겨진 한 마디가 또 다시 생각나
그리움에 젖어도 낙엽은 지고
사랑을 할 때면 그 누구라도
쓸쓸한 거리에서 만나고 싶은 것
|
패티 김(Patti Kim, 본명 金惠子, 1938년 )
1956년 김혜자라는 본명으로 국무총리배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입상
3년 후 1959년 미8군 무대에서 가수로 데뷔하였다
이 시기에 지은 패티라는 예명은 미국 가수 패티 페이지와 같은
명가수가 되고 싶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패티김의 등장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스타가 자신의 타고난 재능과 철저한 자기 관리로
어떻게 새로운 시작을 이끌어 가는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해방 이후 최초로 일본에 진출하고 이어 미국 무대에도 선 패티김은
국내에서는 가수 이외에도 뮤지컬 배우와 영화배우로도 활동하였으며
최초라는 수식어가 늘 함께 따라다니는 가수이자
대중음악계의 이정표와 같은 존재로서 활동했다
〈서울의 찬가〉〈이별〉〈초우〉〈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사랑하는 마리아〉〈못잊어〉〈서울의 모정〉〈그대없이는 못살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살짜기 옵서예〉 등
수많은 히트곡을 부른 그녀는 2012년 은퇴를 선언하고
1년간의 이별 콘서트 투어를 통해 전국의 팬들과 이별을 고한 뒤
2013년 10월 26일 55년 가수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마지막 무대를 가졌다
<패티 김의 주요 경력>
1960년 일본 NHK-TV 초청 패티김 콘서트
(광복 후 한·일 문화교류를 위해 일본정부로부터 공식 초청된 최초의 한국가수)
1962년 '패티김 리사이틀' 종로 피카디리극장
(최초의 개인 이름을 걸고 리사이틀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공연)
1963년 미국 뉴욕·라스베가스 진출 공연 및 뮤지컬 활동
(한국가수 개인 최초 미국진출)
1966년 한국 최초의 창작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주연 (애랑 역)
1967년 TBC-TV 'PATTI KIM SHOW' 진행
(국내 최초 개인 이름을 타이틀화한 프로그램)
1978년 패티김 리사이틀 - 서울의 연가
(대중가수 최초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공연)
198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하우스 데이비스 홀 콘서트
(한국대중가수 최초)
1985년 '제1회 팝스콘서트' 서울시립교향악단과
대중가수의 최초 협연 (예술의 전당)
1989년 미국 뉴욕 카네기 홀 콘서트 (한국대중음악인 최초)
1990년 네스카페 셀렉타 커피 CF 1·2편
(한국 최초의 유럽 현지촬영 - 프랑스, 이탈리아)
2005년 서울사랑 시민상 수상
(서울특별시 시상 - 대중예술인 최초)
2008년 100년 대중가요사 최초 50주년 공연가수 / 세계를 빛낸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대중가수 최초)
**** 출처 : 위키백과 ***
1959년 '린다 김'이라는 예명으로 미8군 쇼 무대에서 활동하다
1960년 초 조선호텔 전속가수로 스카우트되어
'패티 김이라는 예명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한 후
한국을 대표하는 디바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후 빅밴드 스타더스트의 전속 보컬리스트로서
주로 일본과 동남아시아를 오가며 활동하다
1963년 번안곡 〈사랑의 맹세〉를 발표하면서 국내에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최창권의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의 주연을 맡아 주제가를 히트시켰고
박춘석의 〈초우〉와 길옥윤의 〈사월이 가면〉·〈사랑하는 마리아〉
등을 불러 큰 인기를 얻었다
〈서울의 찬가〉를 부르면서는 '국민가수'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1974년 도쿄 국제가요제에 참가해 3위로 입상했고
1978년 대중 가수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공연했다
1989년에는 한국인 가수로는 처음으로 미국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본명은 김혜자. 서울 흑석동에서 살다가 6·25전쟁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을 가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53년 휴전이 되자 서울로 올라와 중앙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화양연예주식회사에서 만든 '베니 김 쇼'의 견습단원으로 들어가
1959년 1월 '린다 김'이라는 예명으로 미8군 쇼 오디션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합격한 후 정식으로 미8군 쇼 무대에서 활동했다
큰오빠의 반대로 1년 여간 활동을 접었다가
1960년 초 조선호텔 전속가수로 스카우트되어 패티 김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이후 재일교포 와타나베 히로시의 초청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빅밴드 스타더스트의 전속 보컬리스트로서 일본과 동남 아시아를 오가며 공연했다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며
조니 카슨의 〈투나잇 쇼 Tonight Show〉에 출연했으며
같은 해 작곡가 박춘석의 권유로 팝송 번안곡 〈사랑의 맹세〉(원제 〈Till〉)를
발표하면서 국내에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6년 어머니의 병환이 깊어지자 한국에 돌아온 그녀는
최창권의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의 주연을 맡아
같은 제목의 주제가를 히트시켰다
또한 박춘석이 작곡한 〈초우〉를 영화 주제가로 부르고 같은 해
길옥윤이 작곡한〈사월이 가면〉〈사랑하는 마리아〉등을 불러서
큰 인기를 얻었고 작곡가 길옥윤과는 같은 해 결혼했다가 1972년 이혼했다
1969년 서울시의 위촉을 받아 만들어진〈서울의 찬가〉를 부르면서
<국민가수>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1971년에는 최초로 '디너쇼'를 시도했으며
1974년에는 도쿄[東京] 국제가요제에 참가해 3위로 입상했다
1978년 대중 가수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패티김 리사이틀-서울의 연가〉를 성공적으로 공연했고
1989년에는 한국인 가수로는 처음으로 미국 뉴욕시티의 카네기 홀에서 공연했다
*** 출처 : 다음 백과 발췌 ***
<주요 수상 내역>
2013.11 제4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문화훈장
2008 제8회 자랑스런 한국인대상 대중예술부문상
2005 서울사랑시민상 문화부문 공연분야
2004 제19회 골든디스크상 공로상
2001 제6회 소비자의 날 부총리 특별표창
1996 대한민국연예예술상 대상
1996 화관문화훈장
1974 동경 국제 가요제 3위
*** 출처 : 다음 인물백과 ***
패티 김이 수 많은 명곡 중 가장 애정을 가지고 부르는 노래로 <9월의 노래>를 꼽았다.
2012년 15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프레스 센터 20층 국제회의홀에서 은퇴기자회견이 열렸을 때
패티 김은 취재진으로부터 가장 아끼는 노래를 묻는 질문에 <9월의 노래>를 언급하면서
"가사가 참 아름다운 노래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나도 감정이 올라온다"고 말했다
*** 편집 : 윤슬 성두석 ****
|
| |